[디지털 이코노미] 현금 두둑히 쌓아두기만 하고…혁신투자에 주저하는 혁신기업 왜

입력 2021-11-2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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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미국 상장 기업들은 1조7000억달러의 현금을 사내에 유보하고 있었다. 전략적 결정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현금이 필요하다. 하지만 잉여현금으로 자사주를 매입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애플은 당시 모든 기업이 납부한 연방 법인세보다 많은 2450억달러의 현금을 보유했지만, 2012년 이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자사주 매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혁신에 소극적인 기존 기업
여전히 많은 모험가가 혁신적인 사업으로 세상에 자신들을 소개한다. 와츠앱과 같이 대기업에 인수되는 형태로 혹은 스포티파이, 우버와 같이 수십억달러의 민간자본을 유치한 뒤 기업공개를 하며 힘들게 혁신을 키워간다. 성공의 방식은 각기 다르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기존 기업 안에서 탄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기존기업도 모험정신에 대한 욕구가 크다. 많은 기존기업은 직원들에게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하기를 촉구한다. 일부 기업은 아이디어경진대회를 열기도 하고, 혁신 전담 부서를 신설하거나 사내벤처 제도를 운영하기도 한다. 성숙한 기업 내에서 위험을 감수하도록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위험에 대해 극단적인 이유
기존기업이 혁신에 소극적인 이유는 조직과 개인이 갖는 편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손실회피다. 이는 1달러의 손실이 1달러의 이익보다 더 강하다는 점에 기인한다. 동전을 던져 뒷면이 나올 경우 100달러를 잃는 게임이 있을 경우 앞면이 나올 때 얼마를 받을 수 있어야 참여할지에 대한 결정이 손실회피의 정도를 결정한다. 200달러는 받아야 한다면 손실회피 계수는 2가 된다. 잃을 수 있는 금액이 100만달러로 커진다면 동전 던지기 게임에 애초부터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 손실회피는 무한대가 된다. 손실회피 경향은 협상에서도 유용하다. 많은 경우 각 당사자는 이득을 얻기보다 동일한 크기의 손실을 피하는 것에 더 적극적으로 합의한다. 변화가 어려운 이유도 손실회피의 결과다. 변화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손실이 훨씬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기업가들은 모르는 위험에 베팅하지 않는다. 기업의 의사결정은 주사위 던지기 게임처럼 승률을 알 수 있는 상황에서 내려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성공 확률은 의심의 대상이 되며 투자수익은 얼마를, 언제 벌 수 있을지 추정조차 하기 힘들다. 이런 현실에서 ‘아는 악마가 모르는 악마보다 낫다’는 라틴어 속담은 비상식적인 위험회피 성향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를 ‘불확실성 회피 성향’이라고 정의한다.

행동경제학에서 설명하는 편향들이 결합되면 과도한 위험 회피 성향이 형성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모험적인 의사결정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위험회피적인 모습을 보이던 기존기업이 엄청나게 모험적인 투자에 뛰어드는 역설적인 모습도 목격된다. 이는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는 지나친 믿음에서 비롯된다. 사업이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은 공감하지만, 관련된 예측에 과도한 자신감이 개입되면 고위험, 고수익 사업에 의식적으로 투자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은 댄 로발로와의 공동연구인 ‘소심한 선택과 대담한 예측’을 통해 과도한 위험회피를 초래하는 편향과 지나친 낙관을 야기하는 편향은 서로 상쇄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선택에 직면할 때 위험 회피적 성향을 보이지만, 지나친 자기 확신과 과도하게 정확한 예측 앞에서 선택은 지나치게 쉽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제도를 통한 혁신투자 유인
최근 우리나라 기업의 사내유보금이 1000조원을 넘어섰다는 점을 두고 기업이 혁신에 투자하지 않아 일자리 창출 둔화와 양극화가 초래되었다는 지적이 존재한다. 사내유보금 가운데 현금성 자산의 비중이 16%가량에 불과하다는 산업계 반론에도 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마저 생겨났다. 제도의 적정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그 목적은 사내유보금을 경제 선순환의 마중물로 쓰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행동경제학에서 진단하는 편향에 기초해보면 이런 처방은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사내유보금의 합리적인 활용마저 가로막는 극단적인 위험회피 성향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업 의사결정자 스스로가 결정을 분명히 이해하면서 위험 회피를 극복하고, 어렵고 위험한 일을 더 자주 시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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