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퇴직연금 자산 가운데 90%가 원리금보장형에 쏠려 있다. 최근 5년간 퇴직연금의 연평균 수익률은 1.8%. 같은 시기 미국 호주 등 연금 선진국의 연평균 수익률은 5~7%에 달한다.
낮은 수익률로 제대로 된 노후보장 제도 역할을 하지 못하던 퇴직연금이 16년 만에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 연금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 도입에 여야가 합의했기 때문이다. 관련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 내년 7월 시행될 예정이다. 디폴트옵션에 대한 주요 내용을 정리해봤다.
작년 말 기준 퇴직연금 총 적립금은 255조5000억원이다. 이 가운데 원리금보장형이 차지하는 비중은 89.3%인 228조1000억원이다. 이 중에는 아무 운용 지시를 하지 않아 방치된 금액이 다수 포함돼 있다. 제로(0) 금리 시대에도 98조5000억원이 예·적금에 담겨 있다. 지난해 원리금보장형 전체 수익률이 연 1.68%에 불과한 이유다.
DC형 퇴직연금은 가입자 개인이 현재도 직접 펀드나 상장지수펀드(ETF)에 투자할 수 있다. 하지만 투자 실패로 연금을 까먹을 수 있다는 우려, 금융지식이나 관심 부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산 대부분이 사실상 방치돼왔다. 미국과 호주 등 연금 선진국들은 이미 디폴트옵션을 도입한 상태다. 안정적인 배당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는 리츠나 생애주기에 맞춰 주식과 채권 비중을 조절해주는 타깃데이트펀드(TDF)에 주로 투자하며 최근 5년간 연평균 5~7%의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근로자가 퇴직연금 가입일로부터 4주가 지날 때까지 별도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사업자는 근로자에게 “적립금이 미리 선택한 포트폴리오로 운용된다”고 통지해야 한다. 통지 이후 2주 이내에도 가입 근로자가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사전에 지정된 포트폴리오로 자동 운용된다.
디폴트옵션이 도입되더라도 현 개정안에 따르면 원리금보장형을 선택할 수 있다. 디폴트옵션에 원리금보장형이 포함될 경우 도입 취지가 무색해진다는 비판이 거셌지만 원금 손실 우려 등을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를 고려해 원리금보장형도 디폴트옵션에 포함하기로 했다. 실제 일본은 디폴트옵션 제도를 도입했지만 원리금보장형이 제도에 포함되면서 여전히 디폴트옵션 투자자의 75%가 원리금보장형으로 운용하고 있다.
디폴트옵션 도입으로 근로자가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은 TDF를 비롯해 밸런스펀드(자산배분·혼합형펀드), 부동산인프라펀드, 머니마켓펀드(MMF) 등이다. 국내 투자자들에게 적합한 상품으론 TDF가 가장 많이 거론된다. TDF는 은퇴 시점에 맞춰 주식과 채권 비중을 알아서 조절해주는 상품이다. 약 30년 뒤인 TDF2050을 고를 경우 상대적으로 주식 투자 비중이 높다. 다만 TDF는 국내에 도입된 기간이 짧아 장기 수익률 부문에서 검증되지 않은 측면이 있다. 현재 가장 긴 수익률이 확인된 상품으론 삼성한국형TDF2045(5년 수익률 62.00%), 미래에셋자산배분TDF2040(57.17%) 등이 있다. 전체 TDF의 5년 수익률은 약 46%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디폴트옵션 도입으로 원리금보장형을 택해 원금을 사수해야 한다는 기존의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박종원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국내 퇴직연금 중 위험자산 비중은 10% 미만이지만 미국 영국 호주의 경우 위험자산 비중이 50% 이상”이라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도 평균 50%이고, 국내 공적 연기금의 위험자산 운용 비중은 60%를 웃돈다”고 설명했다. 원금을 지키기 위해 과도하게 예·적금에만 매몰될 필요가 없단 얘기다.
최종진 미래에셋증권 연금본부장은 “디폴트옵션이라는 것 자체가 근로자가 선택하는 옵션이 생겨날 뿐 당장 원금을 해치는 것은 아니다”며 “확정급여(DB)형이 아닌 DC형 가입자들은 적극적인 퇴직연금 운용을 통해 수익률이 연평균 4% 수준의 임금상승률 이상을 기록해야만 DB형 가입자에 비해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박재원 기자 wonderfu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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