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조원 추경’이 부상한 과정을 보면 포퓰리즘에 포획된 한국 정치 현주소가 여실히 드러난다. ‘내가 서민을 더 챙기고, 배포도 더 큰 지도자’라는 유치한 자존심 경쟁을 보는 듯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25조원 규모의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주장하자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당선 뒤 자영업 보상 50조원’으로 맞불을 놓으며 판이 커졌다. 이후 이 후보는 “포퓰리즘”이라는 여론의 압박에 전 국민 재난지원금 공약을 철회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이 느닷없이 100조원 손실보상을 주장하면서 일단락되던 논란이 일파만파로 더 커지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이 후보가 굴욕을, 국민의힘이 재미를 봤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후보가 ‘100조원을 지금 당장 여야 합의로 편성하자’고 치고 나오자 공수가 뒤바뀌었다. “당선된 뒤에 할 거면 당겨서 못할 이유가 없다”는 역공에 답이 궁해서인지, 윤 후보는 “추경은 이를수록 좋다”며 이 후보 제안을 덥석 받았다. ‘포퓰리스트’를 자처하는 이 후보야 그렇다 쳐도, 윤 후보의 행보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2017년 660조원이던 국가부채가 5년 만인 내년엔 1064조원으로 치솟는 상황에서 국채를 찍어서라도 빨리 재정을 풀자는 주장은 일말의 공감도 얻기 어렵다.
“집권당 후보가 대통령과 행정부를 먼저 설득하라”는 윤 후보의 발언도 부적절하다. 재정 악화 등의 책임은 대통령과 여당에 지우고 자신은 생색만 내겠다는 얄팍한 술수나 다름없다. 선거법 위반 소지가 큰 ‘대선용 돈 뿌리기’에 맞장구를 쳤으니 방만 재정을 질타해온 과거 윤 후보는 딴 사람이란 말인가.
607조7000억원의 초슈퍼 예산안이 열흘 전 통과돼 아직 집행도 안 된 시점에 선심성 추경을 내세운 것은 무책임 정치의 극치다. 혁명공약이라면서 ‘매월 국민배당금 150만원’ 등 황당무계한 공약을 내놓은 허경영 후보도 울고 갈 일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여섯 번의 추경을 통해 소상공인에게 지원된 예산을 모두 합쳐도 22조원이다. 한 방에 100조원을 퍼붓는 것은 형평에 어긋나고 재정을 수렁으로 몰아넣는 위험한 처사다. 대선은 ‘받고 더블로’를 외치는 포커판 제왕을 뽑는 이벤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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