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토지가 부족해서 식량을 자급자족하기에 불충분했고, 군수물품들을 자체 생산할 환경이 안 됐다. 반면에 육지와 거리가 멀어 정부의 예봉을 피할 수 있고,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해양력을 갖춘다면 일본 남송 유구(오키나와) 등과 교류와 무역을 하면서 자립하고, 해군력을 강화해 해양왕국을 건설할 만한 곳이었다. 마치 에게해의 크레타섬이나 이탈리아 반도 아래의 시칠리섬 같은 위상이었다. 이러한 이점들을 간파하고 이미 1270년에 점령했던 삼별초군은 신속하게 ‘환해(環海)장성’이라는 긴 해안 방어체제를 구축하고, 북제주군의 애월읍에는 궁궐과 관청 역할을 한 항파두리성을 쌓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한 고려와 원은 총 병력 1만2000명, 군선 160척으로 여몽연합군을 편성해 1273년 4월 9일에 영산강 하구를 출항했다. 대선단은 추자도를 거쳐 제주도의 곳곳으로 상륙작전을 전개해 삼별초군과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결국 1273년 4월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 군대는 항파두리성을 점령했고, 김통정은 도피했다가 자살했다. 당시 1300명이 포로로 잡힌 것으로 기록됐다. 이로써 40년에 걸친 대몽항쟁은 끝났다. 탈출한 일부 세력들은 일본, 남송, 그리고 오키나와 지역 등에서 또 다른 디아스포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농토와 살림, 이중 정부의 조세징집, 전투력 징집 등으로 생활과 생존이 파괴되는 백성들의 처지 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삼별초 항쟁으로 ‘6·25 전쟁’처럼 전후에 만연했을 가치관의 충돌, 세력들의 분열, 제주도·진도 등 피해지역을 중심으로 만연한 지역 갈등 등 민족력을 소모시킨 현실도 인식해야 한다. 또한 원나라의 장악력이 더욱 강해지고, 일본 공격이라는 명분 없는 전쟁에 국력을 쏟아붓고, 여몽연합군이 편성돼 엄청난 인적 손실이 발생한 계기를 마련한 사실도 부인할 수는 없다.
역사도 개인의 삶처럼 정의와 불의, 선과 악처럼 명확하게 구분하고, 거기에 따라 상벌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면 우리 역사는 현재보다는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됐을까? 역사에서는 일부 시대나 일부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할 수도 있고,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거시적인 명분과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전제로 당시대 사람들의 삶과 행복을 유보하거나 양보할 수는 없다. 더더욱 생존을 담보로 하는 일은 죄악이다.
삼별초. 우리 역사에서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고 사건이지만, 잊을 수 없는 과거이고, 더더욱 잊어서도 안 되는 미래다.
세계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몽골제국을 상대로 벌인 전면전은 현실을 무시한 행위였고, 참혹한 결말로 끝났다. 그러나 그 시대의 주체세력들과 일부 백성들에게 삼별초의 행위는 분명히 소중하고 고귀한 항쟁이었다. 그들의 자유의지와 희생은 오랫동안 외세의 그늘이 드리워졌던 후대의 우리 민족에게 무엇보다도 값진 유산을 선사했다. 이에 ‘난(亂)’으로 평가됐다가 언제부터인가 ‘항쟁’ 심지어는 ‘혁명’이라는 평가까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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