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는 태평양에 접해 있는 국가 간 관세 철폐와 경제 통합을 목표로 삼고 있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의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 당초 작년 연말 가입신청서 제출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차일피일 CPTPP 가입 의사결정을 미뤘다. 그러다 지난달에서야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인 내년 4월 가입신청서를 내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부가 이처럼 머뭇거리는 데에는 어떤 속사정이 있는걸까. CPTPP는 과연 국익에 도움이 되는걸까.
고강도 대외개방을 의미하는 FTA는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분야다. 한쪽에선 FTA는 주요 산업을 망가뜨린다고 아우성을 친다. 또 다른 쪽에선 한국이 살 길은 통상강국으로 가는 것이고, FTA는 이를 위해 반드시 가야할 길이라고 설명한다.
작년 말 한국의 CPTPP 가입 추진은 속도를 낼 것으로 보였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0월 "이제 시간이 없다"는 표현까지 쓰면서 CPTPP 가입 정당성을 강조했다. 홍 부총리는 "(CPTPP 가입) 결정을 11월 초에는 해야 한다. 결정이 막바지에 와 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홍 부총리의 발언 이후 정부는 두 달 여간 침묵으로 일관했다.
CPTPP를 둘러싼 정부의 이같은 머뭇거림은 FTA가 인기없는 정책이라는 데에서 기인한다. 무역장벽을 없애면 자국 내 피해를 보는 산업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다른 국가에 비해서 열위에 있는 산업은 더 이상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농업이 대표적이다. 관세 철폐로 값싼 열대과일이 쏟아지면 과일 농가의 타격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CPTPP가입 얘기가 흘러 나왔다는 점이다. 그러자 농민단체들이 잇따라 총궐기에 나서겠다며 경고를 보냈다. 한 정부 관계자는 "농민들의 집단적 반발을 안고 대선에 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기없는 정책을 밀어붙였다가 불어닥칠 여론 역풍을 간과할 수 없었을 것이란 의미다. 또 정부가 강한 의지로 밀어붙이기 곤란한 대외여건 속에서 여론몰이가 이뤄질 경우, CPTPP가입 자체가 물건너 갈 수 있다는 위기감도 작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담당자들이 대선 이후로 가입 신청서 제출 시기를 늦추고, 숨고르기에 돌입한 이유다.
하지만 이를 막아선 것은 뜻밖에도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알려져 있다. 한미 FTA의 주역이 CPTPP 추진에 제동을 건 것이다. 당시 그는 일본과 FTA를 맺으면 국내 제조업체들이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 문을 여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대만과 중국이 가입신청을 한 이후에도 김 전 본부장이 여전히 CPTPP가입에 반대하고 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김 전 본부장은 노무현 정권 시절 한일 FTA에도 반대한 전력이 있다. 그는 수석대표로 한일 FTA를 진행하다가 일본이 한국의 첫 상대국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판단하고,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한다'는 '손자병법'의 원교근공에 입각한 전술변경이었다. 김 전 본부장은 당시 일본과 중국보다 미국, 유럽, 아세안 등 큰 경제권과 FTA를 먼저 타결하는 게 국익에 더 도움이 된다고 봤다.
가장 중요한 변수는 대만이다. 대만이 CPTPP에 가입해 공급망 동맹을 구성하고, 이 과정에서 한국이 배제되는 것은 그야말로 악몽이어서다. 이는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 대만의 TSMC에 반도체 주도권을 완전히 내주는 것은 한국에겐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의 가입신청을 한 배경에도 대만의 참여가 결정적이어다는 게 통상전문가들의 견해다. 중국의 가입 신청도 한국에 기회다. 중국의 최종 가입 여부를 떠나 일본 중심 체제를 뒤흔들 가능성이 커서다. 이 틈을 이용하면 한국은 뒤늦은 가입에 따른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일본의 리더십이 흔들릴 때 이를 한국의 협상력을 높이는 데 활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이 추후 CPTPP 가입을 추진하는 경우도 대비해야 한다. 만약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연임에 성공하면 중국을 제외한 CPTPP 참여를 모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통상전문가들이 제기하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다.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디지털 통상 분야에서 CPTPP의 내용이 글로벌 통상규범으로 확립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아직 FTA를 맺지 않은 멕시코와의 교류확대를 꾀할 수 있는 점도 장기적으로 이익을 클 것으로 전망된다. 한 통상관료는 "가입 신청만큼은 지금 해둬야 한다"며 "변수가 많아졌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미 한 차례 가입신청 시기를 놓쳤고, 이미 대만·중국과는 한 협상테이블에 올라가기 어려워졌다. 그만큼 가입 비용이 늘었다는 의미기도하다.
기존 회원국들이 ‘쌀시장 추가 개방’을 요구하거나 이를 지렛대 삼아 다른 품목의 추가 개방을 압박할 수 있다. 수산보조금, 공기업 지원 등 CPTPP 규정과 상충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 국내 반발도 넘어야 할 산이다. CPTPP는 시장 자유화 수준이 96~100%로 매우 높다. 특히 농식품 분야 시장 개방은 민감한 주제다. 시장 개방 정도는 앞으로 CPTPP 가입 협상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한미 FTA를 고려했을 때 96~97% 수준의 개방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미 FTA 당시에도 미국이 스크린쿼터, 의약품가격, 배기가스, 쇠고기 등 이른바 4대 선결조건을 내걸어 논란이 됐다. 참여정부는 지지층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이 중에 기존 한국영화 상영일을 146일에서 73일로 줄이는 스크린쿼터 축소는 받아들여졌다. 이 네가지 사안이 문제가 됐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이 문화관광부·보건복지부·환경부·농림부 장관을 모두 직접 불러서 토론을 했던 일화는 지금도 관가에 회자된다. 당시 협상에 참여했던 한 통상관료는 "당시 대통령이 직접 각 장관들이 내세우는 산업 보호 논리를 하나 하나 논파했다"며 "한국 영화산업이나 축산업계가 한미FTA 이후 오히려 더 경쟁력이 강화됐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통상 관료는 "대통령이 강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한미FTA 협상 타결이 가능했던 것"이라며 "노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온 뒤 FTA 찬성으로 입장을 바꿨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liz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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