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이 수북이 쌓였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작업실은 공예실에 가까웠다. 책을 섬세히 되살리기 위한 각종 도구와 화학약품이 곳곳에 놓여 있다. 추억이 쌓인 책을 되살리려면 그만큼 복잡한 손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18년부터 3년간 그의 손을 거쳐 주인 품으로 돌아간 책은 100권이 넘는다. 최근에는 그동안의 책 수선 기록을 엮어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왜 그는 ‘책 수선’이라는 특이한 직업을 택했을까. 배 대표는 “책을 수선하는 일은 의뢰자의 추억을 수선하는 것과도 같다”며 “책은 정보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 시대를 담고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28일 배 대표를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제가 다닌 미국 대학은 고서적을 따로 모은 ‘보존실’을 둘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 보관하고 있었어요. 이때 수선한 책만 1800권은 족히 넘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오래된 책을 접할 기회도 많았죠. 책을 해체하고 수선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오래된 책에 묻은 역사의 흔적을 보게 돼요. 종이가 귀하던 시절 발간된 책에는 신문지를 이면지로 활용한 게 보입니다. 가끔은 누군가가 남긴 러브레터가 책 안에서 발견되기도 하지요. 독자는 책의 내용을 먼저 보지만 수선가는 그 책의 탄생부터 늙어가는 ‘일생’을 보는 셈입니다.”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2018년 2월 책 수선점을 차렸다. 한국에선 ‘책을 수선한다’는 개념이 낯설었던 만큼 시행착오도 있었다. 책 수선을 위한 도구와 약품을 준비하는 것은 물론 업계 은어에 익숙해지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인쇄용지의 귀퉁이를 둥글게 처리하는 걸 한국에서는 ‘귀도리’라고 합니다. 인쇄업계에서 흔히 쓰는 용어지만 저는 이런 걸 몰랐으니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지요. 한국에서는 책 수선을 전문적으로 하는 가게가 희귀하다 보니 ‘과연 잘될까’란 걱정도 많이 했고요. 그래도 해보고 싶은 일인 만큼 ‘없으면 내가 해보자’는 생각이 더 앞섰습니다.”
페이지 일부가 찢겨 유실된 책은 기존 도서를 참고해 잃어버린 부분을 메워넣기도 한다. 책의 판형, 글꼴, 종이 질감 등을 모두 고려해 최대한 비슷하게 만든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치다 보니 한 달에 수선하는 책은 많아야 4~5권이다. 부피가 큰 책은 몇 달씩 걸리기도 한다.
책 수선을 맡기는 사연은 각양각색이다. 수업에 사용할 전공 서적을 맡기러 온 대학생부터 망가진 결혼식 앨범을 고쳐 아내에게 선물로 주려는 남편,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동화책을 맡긴 직장인, 손때가 탄 성경을 자식에게 물려주려는 부모, 할머니가 쓰던 70년 넘은 일기장을 수선하려는 손녀 등 다양한 사람이 배 대표의 가게를 찾는다.
책 수선가 외에 배 대표가 짬짬이 하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책을 수선하는 과정에서 나는 각종 소리를 편집해 유튜브에 올리는 것이다. 책 수선이란 행위를 시각 외에 청각적으로도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배 대표는 “출판 외에도 유튜브와 전시회 같은 형태로 사람들에게 책 수선을 알리고 싶다”고 했다.
배태웅 기자 btu10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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