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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8월 서울 장충동 고개. 왕십리에 있는 거래처에서 구리 스크랩(금속 조각)을 한가득 모아 자전거에 싣고 온 30대 청년이 멈춰섰다. 근처에 놀고 있는 꼬마들에게 5원 한 닢씩을 쥐여줬다. 청년은 꼬마들이 밀어주는 자전거를 끌며 힘겹게 고개를 올랐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언덕길을 타고 내려가는 탄력을 살려 이태원 삼각지를 지나 구리 제조 공장이 있는 영등포까지 내처 달렸다. 훗날 국내 황동봉의 50% 이상을 생산하며 연 매출 1조원을 올리는 대창그룹을 일군 조시영 회장의 구리 인생 반세기는 그렇게 시작했다.
수소문 끝에 찾아간 곳은 문래동의 자그마한 공업소. 철공소와 폐품 수거업체에서 모은 구리와 고철 등을 녹여 덩어리 형태로 판매하던 속칭 ‘마치코바(영세 공장)’였다. 가정집에 딸린 작업장에서 일하고 바로 옆의 쪽방에서 잠을 자는 생활이 이어졌다. 월급 한 푼 없이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일하며 기술을 배웠다.
청년은 밤낮없이 일했다. 4시간 이상 자지 않았다. 타고난 성실함도 있었지만 일을 빨리 배우고 싶다는 열정 때문이기도 했다. “내 일이라면 그렇게 못 했을 텐데 남의 일이라 더 열심히 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이곳에서 원자재 구매부터 영업, 생산까지 구리 주조업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웠다.
그렇게 4년간 일하자 추석 명절 때 사장이 그동안 일한 품삯을 모아서 50만원을 내줬다. 집 한 채가 100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그 돈으로 고향의 부모를 위해 논 열 마지기를 샀다. 그때부터 월급 3만원을 받는 정식 직원으로 일했다.
조 회장이 독립한 건 상경하고 10년이 지난 때다. 원래 근무하던 작업장 근처에 터를 잡아 대창공업사를 창업했다. 젊은 시절부터 워낙 고생스러운 여정을 겪은 그는 “5억원만 모으면 일 안 하고 쉬겠다”는 목표를 잡았다. 그간 쌓아온 인맥과 신용 덕분에 사업은 순탄했다. 창업 초기부터 조 회장은 아무리 작은 거래처와의 약속도 납기를 칼같이 지켰다. 원자재 함량도 속이는 일 없이 정량을 지키며 최고 품질을 유지했다. 현재 대창의 사훈도 ‘신용’과 ‘정직’이다.
조 회장은 되레 설비 투자 욕심이 생겼다. 반월공장에 도입한 전기로(전기를 사용해 금속을 녹이는 대형 용해로)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민을 거듭하던 조 회장은 일본에서 오퍼상을 하는 지인의 소개를 받아 해외 공장들을 견학했다. 일본의 황동제조기업 삼보신동, 독일의 금속가공기업 KM메탈 등의 시설을 둘러봤다. 조 회장은 “언젠가 대창을 방문한 일본 삼보신동 최고경영자(CEO)가 자기들이 100년 전에 하던 시설이라고 말했을 때 받은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세계 최고의 황동봉 제조기업을 만들겠다는 오기가 발동한 것도 그 무렵이다. 이제 막 회사 전체 매출이 1000억원을 넘긴 시절이었다. 조 회장은 3만3000㎡의 공장 부지를 마련했다. 중소기업에 무슨 그리 큰 땅이 필요하냐며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조 회장은 굽히지 않았다. 이어 일본을 능가하는 자동화 설비를 들여오겠다는 생각에 독일에서 전기로와 압출기, 인발기 등 자동화 설비를 들여왔다. 설비 투자에만 1000억원을 썼다. 조 회장은 “매출이 1000억원이던 때였으니 다들 미쳤다고 수군거렸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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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환율이 급등하면서 발생한 키코(KIKO) 사태 때도 “환율이라는 것은 오를 때가 있으면 내릴 때가 있다”며 소송보다는 은행과의 협상을 선택해 과감하게 만기를 연장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결국 대창은 환율이 떨어진 뒤 안전하게 빠져나왔다.
50여 년을 동(銅)산업에 몸 바쳐온 조 회장에게 황동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황동은 한국 산업을 키운 ‘황금빛 쌀’입니다. 주 원자재로 쓰는 구리 스크랩을 보면 아주 작고 볼품이 없습니다. 대창은 그런 스크랩을 긁어모아 꼭꼭 씹어 삼켜서 볼트·너트, 기어밸브, 자동차 기어, 반도체 기판, 바이오 기기로 소화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앞으로도 대창이 한국 제조업 성장과 함께하는 것이 마지막 목표입니다.”
구리는 100% 재활용 자원…'中 블랙홀' 막을 대책 필요
그룹의 뿌리이자 국내 1위 황동봉 제조기업인 대창은 황동을 긴 막대기 형태의 봉으로 생산한다. 생산량은 연간 13만t으로 국내 시장점유율이 50%에 달한다. 국내에서 수집한 구리 스크랩(부스러기)을 녹여 제품을 만든다. 원자재를 녹이는 용탕의 온도는 1100도로 구리 60%, 아연 40%, 소량의 납과 주석, 알루미늄, 마그네슘 등이 포함된다.
황동 쇳물은 틀에 부어져 지름 24㎝, 길이 1.3m, 무게 0.5t의 굵은 기둥 형태 빌릿으로 만들어진다. 이후 빌릿이 완전히 식기 전에 꺼내 열간 압출기가 주사기에서 내용물을 짜내듯 5.5~110㎜ 두께로 강하게 밀어낸다. 이어 금속을 잡아당기는 인발 공정을 거치며 고객사가 원하는 지름과 길이의 제품이 된다.
스크랩을 주원료로 하기 때문에 구리 원석을 녹여 제품을 만드는 것보다 탄소배출량이 적다. 구리는 100% 재활용되는 자원이라는 점에서 환경친화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조시영 회장은 “금속 자원을 재활용한다는 측면에서 대창은 1970년대부터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해온 셈”이라고 했다.
구리 가격이 계속 오르면서 대창의 매출과 영업이익도 연일 신기록을 내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2020년 3월 런던금속거래소(LME) 기준 t당 4617달러까지 떨어졌던 구리 가격은 10일 기준 9665달러까지 올랐다. 구리 스크랩은 LME의 99% 수준에서 가격이 정해진다. 구리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세는 대창의 ‘롤마진(제품가-원재료가)’을 끌어올린다.
조 회장은 한국의 구리산업 생태계를 걱정했다. 비싸진 구리 가격에 최근 중국에서 한국 구리 스크랩을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국내 일부 수출업자들이 구리 스크랩을 아무런 증빙자료도 없이 폐기물이라며 중국에 반출하고 있다”며 “한국에 있는 구리 스크랩은 자체적으로 활용을 계속할 수 있어야 자원 순환이 이어지는 만큼 정부 당국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조시영 회장은
△1944년 전북 군산 출생
△1974년 대창 창업
△1992년 상공부장관상
△1995년 국무총리상
△1997년 시흥 상공회의소 회장
△2001년 동탑산업훈장
△2004년 금탑산업훈장
△2019년 중소기업중앙회 부회장
시흥=김진원 기자 jin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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