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의 경영권 보호를 위해 정부가 추진해온 차등의결권 도입이 또다시 무산됐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지난 10일 전체회의에서 차등의결권 관련 내용을 담은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논의 안건에 올리지 않았다. “소액주주 이익을 해칠 수 있다”는 몇몇 강경파 의원의 반대 탓이었다. 벤처업계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민주주의 선거가 ‘1인 1표’를 핵심으로 한다면, 기업의 의결권은 ‘1주 1표’가 기본 원칙이다. 그런데 해외에선 최대주주와 경영진의 권한을 강화해 줄 목적으로 특정 주식에 특별히 많은 수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이것이 차등의결권이다.
쿠팡은 차등의결권에 매력을 느껴 한국 대신 미국 뉴욕증시에 상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업자 김범석 이사회 의장의 1주는 다른 주식 29주에 맞먹는 의결권을 가진다. 차등의결권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황금주다. 딱 1주만 갖고 있어도 주주총회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식으로, 초강력 경영권 방어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차등의결권은 회사의 리더십이 쉽사리 흔들리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운영되는 데 도움을 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7개국이 차등의결권을 도입했다. 외부 투자금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창업자 지분율이 쪼그라들어도 경영권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장점으로 꼽힌다. 벤처 생태계가 발달한 미국, 이스라엘, 싱가포르 등은 물론 중국까지 이 제도를 허용한 배경이다. 세계 시가총액 100대 기업 중 차등의결권이 있는 기업과 없는 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는 3.9배, 매출 증가율은 4.1배 격차를 보였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국내 도입이 번번이 무산됐던 원인은 “경영권 세습에 악용되는 재벌 특혜”라는 반대 논리였다. 이번 벤처육성법 개정안은 양도·상속·상장 시 차등의결권을 무력화하고,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정하는 등 보완장치를 마련했다. 벤처기업 차등의결권은 여당의 총선 공약이자 대통령의 약속이기도 했다. 숙원이 풀릴 것으로 기대했던 업계의 절망이 클 수밖에 없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