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중세 전문가 소피 카사뉴 브루케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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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1436년에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기 전에는 모든 책이 오랜 시간 필경사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 그중에서도 ‘채색 필사본’은 최상급 양피지에 손 글씨를 쓰고 화려한 채색과 세밀화 등의 장식을 넣어 금은박, 보석으로 아름답게 장정한 책을 가리킨다. 세밀화가, 서예가, 채식사, 제지업자, 표지 제작자 등 당대 최고 장인들이 수년 동안의 공동 작업을 통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명품 책이 태어났다.
따라서 책값도 엄청나게 비쌌다. 양피지로 책 한 권을 만들려면 새끼 양 수십 마리를 잡아야 했다. 채색 필사본은 중세시대 특권층인 왕족, 귀족, 성직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고귀한 물건이자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최고의 사치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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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색 필사본은 중세인들의 의식주 문화와 시대상을 담은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자 예술 작품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중세에 제작된 채색 필사본 중 프랑스 콩테미술관 소장품인 ‘베리 공의 매우 화려한 기도서’는 ‘채색 필사본의 제왕’으로 불릴 만큼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프랑스 왕 샤를 5세의 동생인 장 드 베리 공(公)은 진기하고 아름다운 미술품과 호화로운 채색 필사본을 수집하는 소장가이자 예술 후원자였다. 그는 네덜란드 출신의 세 형제 화가인 랭부르 형제(?~1416)를 자신의 궁정으로 초대해 채색 사본과 세밀화로 구성된 두 권의 기도서 제작을 의뢰했다.
그중 ‘베리 공의 매우 화려한 기도서’는 미학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명화 달력으로서 미술사적 가치도 매우 높다.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사용하는 종교적인 책인데도 열두 달의 자연 세계와 그 달과 관련이 있는 행사나 일상생활을 묘사한 세밀화가 월별로 실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 소개하는 그림은 열두 장의 달력 그림 중 1월에 해당된다. 베리 공의 호화로운 궁정 안에서 새해맞이 축하 잔치가 성대하게 열리고 있다. 당시 1월에는 세배객들이 연회가 열리는 궁정에 모여 새해 인사를 나누고 선물을 교환하는 풍습이 있었다. 베리 공은 황금 실로 장식된 파란색 옷과 값비싼 보석이 박힌 모피 모자를 쓰고 음식이 차려진 탁자 앞에 권위와 위엄을 보이며 앉아 있다. 그의 주변에는 대주교와 화려하게 치장한 귀족들이 공작에게 인사하거나 음식을 즐기고 있다. 화면 왼편에는 세배객들이 공작에게 새해 인사와 감사의 선물을 전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배경의 빨간 기둥은 공작 가문의 문장인 황금색 붓꽃과 백조 문양으로 장식됐는데 이는 베리 공이 고귀한 왕족 혈통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벽 뒷면에는 중세기사들의 전쟁 장면을 묘사한 호화로운 태피스트리(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가 걸려 있다. 공작 가문의 문장, 태피스트리, 음식이 담긴 화려한 식기, 공작의 반려견들이 식탁 위에 올라가 고급 요리를 먹고 있는 장면을 연출해 베리 공의 막강한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강조하고 있다. 베리 공의 머리 뒤쪽 왼편 빈 공간에 ‘가까이 오라, 가까이 오라’는 황금색 글귀가 적혀 있는데,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환영한다는 뜻이다. 공작이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너그럽고 자비심이 깊으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장치다.
이 세밀화가 1월의 달력 그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물이 있다. 그림 위쪽 분도기 형태의 반원형 안에 태양을 상징하는 전차와 황도십이궁(黃道十二宮)의 하나로, 한 해를 시작하는 1월에 해당하는 염소자리와 물병자리가 그려져 있다. 황도 12궁이란 태양의 궤도(황도)를 분할하는 12개 별자리를 뜻한다. 별의 운행을 우주의 질서이자 자연의 섭리로 여겼던 중세인들은 하늘을 관찰하면서 계절마다 찾아오는 절기를 알았고, 태양이 지나는 길을 따라 별자리 12개를 정해 달력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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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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