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사람들이 빚으로 주식에 투자하거나 주택을 구입한다. ‘레버리지’라 불리는 전략으로 빚을 내어 자산을 매입하면 더 큰 수익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의 이면에는 ‘인플레이션’이 존재한다. 자산이 주식이든 주택이든 예술품이든 인플레이션은 자산 가치를 높여준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득이 증가해 대출금 상환은 쉬워지고, 자산 가치는 상승한다. 부채가 부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지금까지의 방식이다.
기술의 발전과 디플레이션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물가 상승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스마트폰이 대표적이다. 30년 전 무선전화 가격은 오늘날의 노트북 가격만큼 비쌌고, 성능도 보잘것없었다. 10시간가량 충전해야 겨우 30분 남짓 사용할 수 있었다. 통화요금 역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날 휴대폰은 더 저렴해지고 강력해졌다. 휴대폰은 통화는 물론 카메라, 손전등, 지도, 달력, 결제수단 등 수백 가지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 무료다. 기술 발전으로 가격 대비 큰 효과를 누리게 된 것이다. 기술산업 전체로 시야를 넓혀도 비슷한 현상을 살펴볼 수 있다. 구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텐센트, 알리바바 등 플랫폼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무료거나 지속적인 저가 정책 또는 같은 가격이라면 이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즉, 기술 발전으로 더 적은 돈을 내고 더 많은 것을 받는 셈이다.
부채로 유지되는 성장
하지만 현실에서는 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높다. 그 배경에는 신용거래와 부채 증가라는 현상이 존재한다. 신용을 기반으로 한 금융 시스템은 미래에 수익을 얻기 위해 현재 돈을 빌려주는 방식을 의미한다. 오늘 돈을 빌려준 대가로 나중에 더 많은 돈을 받기 위해 일시적으로 돈에 대한 효용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빌리는 사람은 그 반대다. 오늘 더 많은 돈의 혜택을 누리고 내일은 대출금과 이자를 갚아야 한다. 여기서 핵심은 빌려주는 사람과 빌리는 사람 사이에 놓인 신뢰다. 즉, 지금 돈을 빌려 대출금과 이자를 갚을 만큼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신뢰가 신용을 기반으로 한 금융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도록 해준다. 상환에 대한 신뢰가 사라진다면 금융 시스템은 빠르게 붕괴할 수밖에 없다. 한편 국내총생산(GDP)의 대부분은 가계 소비로 구성돼 있다. 이는 소비하지 않으면 GDP 성장이 정체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의 일자리와 낮은 이자율, 낮은 세금이 필요하다. 이는 국가가 돈을 지원해줄 테니 이를 소비해 GDP와 고용 시장의 단기 성장을 리드하라는 의미와도 같다.
문제는 이런 순환이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울 때 발생한다. 즉, 부채의 증가 속도가 경제의 성장 속도보다 빠를 때 시스템은 멈춘다. 2000년 세계 총부채는 약 62조달러였고, 세계 경제 규모는 약 33조5000억달러였다. 이후 세계 경제는 80조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문제는 부채다. 2018년 3분기 기준으로 세계 부채는 247조달러로 늘어났다. 약간 비약하면 세계 경제 규모 46조달러를 성장시키기 위해 185조달러의 부채가 투입됐다고 볼 수 있다. 1초에 1000달러씩 갚는다 해도 상환에 8000년이 걸리는 엄청난 액수다. 1달러 성장을 위해 4달러의 추가 대출금이 필요한 상황은 금융 시스템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이 생길 수 있는 대목이다.
기존 성장공식의 근본적인 재검토
물론 부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빚을 자동화나 디지털 전환에 투자해 미래에 더 높은 이득을 얻으면서 상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수입보다 지출이 많거나 수익이 나지 않는 곳에 투자한다면 현재 자금은 이자와 원금을 갚는 데 할당돼야 하므로 빚은 미래 성장에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는 부채나 신용거래를 통해 성장을 가속화할 수 있었다. 디지털 기술의 기하급수적인 발전 역시 손쉬운 신용거래와 낮은 대출 이자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성장은 둔화되고, 기술 발전이 물가 하방압력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현시점엔 성장방식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기술 발전으로 인한 효율성 개선 그리고 이로 인한 일자리 감소 등은 어느 수준에 이르면 부채 규모의 확대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될지 모른다. 기술 발전이 가져올 저비용, 고효율 시대와 세계 부채 규모를 고려할 때 지금까지 경제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성장과 인플레이션’의 기조가 언제까지 유효할지 냉정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