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늦가을 청량리
할머니 둘
버스를 기다리며 속삭인다
“꼭 신설동에서 청량리 온 것만 하지?”
* 유자효 : 1947년 부산 출생. 1968년 신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직』, 『심장과 뼈』, 『사랑하는 아들아』, 『성자가 된 개』, 『내 영혼은』, 『떠남』, 『짧은 사랑』, 『꼭』 등 출간. 정지용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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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g.hankyung.com/photo/202201/01.28718298.1.jpg)
신설동에서 청량리까지는 시내버스로 네 정거장, 약 15분 거리입니다. 지하철로는 2구간 4분, 택시를 타면 기본요금 거리죠. 걸어가도 30분이면 됩니다. 이 짧은 거리가 두 할머니에게는 여태까지 걸어온 인생의 주행거리입니다.
이 시는 속도와 시간, 거리와 공간의 의미를 사람의 일생으로 응축해 보여줍니다. 이런 장면을 포착해서 순간 스케치처럼 보여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시인이 보여주는 풍경의 한켠에는 ‘느린 속도’와 ‘멈춘 걸음’과 ‘생의 비의’가 함께 있습니다.
은퇴 후 ‘어릴 때부터 걷고 싶었던 시인과 기자의 두 길’을 ‘한 길’에서 만나게 되면서 그는 더 내밀한 세상의 풍경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시 ‘속도’를 한 번 볼까요.
‘속도를 늦추었다/ 세상이 넓어졌다// 속도를 더 늦추었다/ 세상이 더 넓어졌다// 아예 서 버렸다/ 세상이 환해졌다’
이 시처럼 삶의 속도를 늦추면 세상이 넓어 보입니다. 속도를 더 늦추면 세상이 더 넓어지고, 아예 멈춰 서 버리면 세상이 모두 환해집니다. 그제야 잊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지요.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것 중에서 소중하고도 살가운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는 지난해 봄 신문 칼럼에 이렇게 썼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에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습니다. 아내와 함께 찾아본 집 근처 산에는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납니다. (…)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의 데이트였습니다. 연애 시절에는 그리움에 안달복달했었건만, 결혼 이후 아내와의 대화는 생활적인 것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무려 반세기 만에 찾게 해준 것이 이 듣도 보도 못했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였습니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가족과 사랑의 의미도 특별해 보이겠지요. ‘아침 식사’라는 시에서 그는 ‘아들과 함께 밥을 먹다가/ 송곳니로 무 조각을 씹고 있는데/ 사각사각사각사각/ 아버지의 음식 씹는 소리가 들린다/ 아 그때 아버지도 어금니를 뽑으셨구나// 씹어야 하는 슬픔/ 더 잘 씹어야 하는 아픔’이라고 썼습니다. 작은 식탁 위에 3대의 인생이 겹쳐지는군요. 짠한 마음이 들다가도 이내 마음이 환해집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지요.
그는 그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간격’까지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 간격과 거리는 곧 무한천공의 우주로 펼쳐집니다. 이럴 때 그는 ‘그리움’이라는 배를 타고 유영하는 우주항해사 같기도 합니다.
‘그를 향해 도는 별을/ 태양은 버리지 않고// 그 별을 향해 도는/ 작은 별도 버리지 않는// 그만한 거리 있어야/ 끝이 없는 그리움’(‘거리’ 전문)
이 모든 게 속도를 늦춰야 보이는 것들이지요. 저도 오늘부터 생의 보폭을 줄여보려 합니다. 더 천천히, 더 느리게, 마침내 한 지점에 멈춰 서서 환하게 피어나는 세상의 봄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지요.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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