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확산 초기 싱가포르에서는 투자자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소문이 돌았다. 무명의 한 투자 매니저가 니켈 거래로 분기당 15%의 수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었다. 회계사 출신의 투자 매니저 응 유 지(34) 얘기였다.
입소문이 나자 그에게 돈을 맡기겠다는 투자자들이 급증했다. 응이 설립한 무역회사 '엔비그룹'은 순식간에 15억 싱가포르달러(약 1조3000억원)를 모금했다. 응은 분기마다 꾸준한 수익을 올리며 승승장구하는듯했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비싼 동네의 저택은 물론 요트와 고급 자동차도 여럿 사들였다. 성공한 투자 매니저처럼 보였다.
하지만 응을 믿고 돈을 맡긴 투자자들이 재앙을 맞게 됐다고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가 1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응은 지난해 2월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은 응이 싱가포르 역사상 가장 큰 사기 행각을 벌인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응은 실제로 니켈 거래를 일으키지 않았다. 투자자들에게서 받은 돈 4억7500만 싱가포르달러(약 4200억원)를 자신 계좌에 송금하고 사치를 하는 데 썼다. 그에게 투자금을 맡긴 고객 중에는 고위 변호사, 전직 은행 임원들, 사업가들도 적지 않았다.
응은 무역회사를 차렸다. 운도 좋았다. 국제 원자재 가격은 2008년 최고점을 찍은 뒤 반 토막 수준으로 떨어졌다. 자본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원자재에 돈을 묻어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싱가포르라는 지정학적 이점도 컸다. 당시 싱가포르는 동남아시아 국가들뿐 아니라 중국 인도 등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하면서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로 떠올랐다.
실제로 그의 예측이 맞았다. 전기자동차 시장이 급팽창하면서 니켈 수요는 급증했고 가격도 고공 행진했다. 응을 찾는 투자자들의 줄이 끊이지 않았다. 싱가포르 국영 투자회사 테마섹홀딩스의 펙 시옥 란 총괄고문이 560만 싱가포르달러(약 50억원)을 투자했다. 스탠다드차타드 글로벌 상품 담당자 출신인 애런 머시는 100만 싱가포르달러(약 9억원)를 맡겼다. 싱가포르의 유명 벤처 투자가인 피니언 탄과 그의 파트너들은 총 2600만 싱가포르달러(약 232억원)을 투자했다.
이들 투자자가 구제받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20년 3월 싱가포르 시장 감시 기관인 싱가포르통화청은 엔비그룹을 투자 경고 목록에 올렸다. 하지만 이 소식에 동요하는 투자자는 거의 없었다. 한 투자자는 "매년 수십 개의 펀드가 투자 경고 목록에 오르기 때문에 별일이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며 "무엇보다 싱가포르의 유명 인사들이 투자했는데 누가 의심했겠느냐"고 말했다. 그새 투자금은 15억달러로 불어났다.
물론 실제로 니켈 거래를 한 적도 있었다. 2020년 7월과 8월 엔비그룹은 4200만 싱가포르를 들여 무역회사 라퍼멧(Raffemet Pte)으로부터 2000M/T(메트릭톤) 이상의 니켈을 샀다. 응과 엔비그룹 직원들은 적재된 니켈 덩이를 살펴보는 영상도 촬영했다. 하지만 엔비그룹은 비디오 녹화 이후 즉시 라퍼멧에 니켈을 되팔았다.
응은 현재 자택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싱가포르 역사상 최고 수준의 보석금인 400만 싱가포르달러(약 35억원)를 내고 풀려났다. 블룸버그는 응이 중대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재판에서 혐의를 부인할 경우 수년 동안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만약 혐의를 인정한다면 곧바로 구금되겠지만, 최대 징역 20년에서 감형을 받을 확률이 크다는 설명이다.
박상용 기자 yourpencil@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