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밥솥 등을 생산하는 쿠쿠전자는 최근 경남 양산공장의 공작기계설비를 자동화하고 노후 장비를 교체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최근 시행한 중대재해처벌법을 고려해 혹여 있을지 모를 안전사고를 최소화하겠다는 취지다. 회사 관계자는 “예측 가능한 문제를 찾아 광범위한 매뉴얼을 마련하고 있다”며 “국제표준 안전보건경영 시스템 취득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ISO 45001은 작업자 안전을 위한 산업보건 및 안전관리 경영 시스템의 ISO 국제표준이다.
쿠쿠전자는 중대재해법이 건설·화학 등 산업재해가 잦은 업종이나 10대 그룹에 포함되는 대기업만의 이슈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미리 대처한 것이다.
산업안전 전담 조직 만드는 기업
정수기 등 렌털 사업을 하는 코웨이는 지난해 3월 산업안전팀을 신설하고 안전사고 예방에 집중하고 있다. 코웨이는 코디라 불리는 방문판매 직원의 관리에 신경 쓰고 있다. 수천 명에 달하는 코디들이 외부에서 일하다 안전사고를 당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회사 관계자는 “방문판매원 등 특수형태근로종사자도 중대재해법의 적용을 받는다”며 “코디의 초기 근무 시 안전과 보건교육을 대폭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안마의자로 유명한 바디프랜드도 지난해 중대재해 TF(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한 뒤 안전보건전담팀을 신설했다. 주요 공장과 물류센터의 안전시설을 점검하고 안전화·안전모 등 기본 안전장비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바디프랜드 관계자는 “주요 제조공장이 중국에 있어 국내에선 물류 창고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화재 위험에 가장 신경 쓰고 있다”며 “정기적으로 점검·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SK네트웍스의 가전 렌털 자회사인 SK매직 역시 올 초 본사 경영전략본부에 중대안전사고대응팀을 신설했다. 주요 제품을 생산하는 화성공장의 안전사고 관리팀(SHE팀)과 별도로 모든 사업장의 안전, 보건 관리와 재해 예방에 나서고 있다는 설명이다.
정수기업체 청호나이스는 사내 제조본부장을 위원장으로 한 안전보건위원회를 꾸리고 안전 전담 부서 신설을 준비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위원회에서 안전 전담 부서 신설을 위해 인원, 예산, 평가, 교육 등에 대한 세부안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사고 예방 노력이 경영자 책임 좌우”
중소·중견기업의 이런 움직임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과도 맥이 닿아 있다. 산업재해가 발생하면 S(사회) 영역에서 기업은 물론 경영자의 리스크(위험)가 크게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삼표산업의 토사 붕괴 사고, 여수산업단지 내 여천공장 폭발 사고 등 중대재해법 적용이 문제가 될 만한 각종 기업의 안전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중대재해법에 따르면, 근로자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는 1년 이하 징역이나 10억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하지만 법 적용 대상과 범위가 애매해 대비해야 하는 기업으로서는 많은 혼란과 어려움이 커졌다. 김동욱 법무법인 세종 중대재해대응센터장은 “사고 예방을 위해 예산을 투입해 조직을 만들고 필요한 매뉴얼 등 제도를 마련하는 등 경영자가 노력을 다했는지 여부에 따라 중대재해법의 책임 부담이 달라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특히 CSO(최고안전책임자)를 선임하는 등 안전관리 전담 조직을 대폭 확대한 대기업과 달리 중소·중견기업은 조직개편이나 안전교육 등 소극적 대응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자금 여력이 부족해 안전관리를 위한 투자가 어렵고 관련 인력도 충원하기 힘들어서다.
이상헌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당분간 E(환경)보다 S 영역의 리스크가 기업에 더 중요할 것으로 내다봤다. E 부문의 경우 작년부터 본격화된 글로벌 공급망의 불안정으로 기업에 대한 환경 관련 규제가 다소 완화되고 있다. 이 연구원은 “안전사고 등 S에 해당하는 문제의 경우 앞으로 기업이 다루지 못하면 브랜드·명성 같은 무형자산 가치가 하락하고 매출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S 부문을 기업가치를 높인다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산업재해 많은 기업엔 주주권 행사”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ESG 경영 차원에서 산업재해를 관리하는 기업이 꾸준히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중대재해가 발생하거나 산업재해율이 높아지면 ESG 평가에서 감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재해는 ESG 평가기관이 S 부문에서 눈여겨보는 항목이다. 세계 최대 평가기관인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은 ‘근로자 건강·안전’이 S 평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최대 13%(에너지 업종)에 달한다. 산업재해율이 갑자기 높아진 기업은 감점 처리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근로자 사망 사고 등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타격이 더 커진다. ‘사회적 논란(controversy)’ 항목에서 추가로 점수를 잃게 된다.
글로벌 자산운용사 등 주식시장의 큰손들도 산업재해 이슈를 눈여겨보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에서 아시아 지역 스튜어드십팀을 이끄는 원신보 본부장은 “중대재해법 시행을 기점으로 주주총회에서 들여다보는 ESG 이슈에 산업재해를 포함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은 경제 규모에 비해 산업재해가 잦은 국가로 분류된다”며 “의결권 행사를 통해 기업에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겠다”고 강조했다.
2030년부터 모든 유가증권시장 상장사가 ESG 활동 내역을 의무 공시하도록 규정하면서 ESG 평가기관의 힘도 커지고 있다. 국내 상장기업의 지배구조 평가기관인 한국기업지배구조원(KCGS)은 2011년부터는 사회책임과 환경경영 등이 포함된 ESG 평가를 하고 있다. 지난해 상장회사 950사를 대상으로 7개 등급(S, A+, A, B+, B, C, D)으로 평가를 진행했다.
김동현 기자 3cod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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