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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설 세력은 왜 서둘러 천도를 결정하고, 한양을 수도로 선택했을까. 수도 선택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직결된다. 백성의 생존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사안이다. 세계 역사에는 수도를 잘못 선택해 멸망한 나라들이 많다. 우리 역사에서도 이러한 예들이 있다.
이성계, 정도전, 승려 무학 등 조선을 건설한 이들의 천도 결정은 조선의 백성과 역사, 현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신세력은 개경 지역에 토대를 둔 구세력과 권력, 토지 및 자원 확보, 상업권, 그리고 명분과 정통성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개경은 왜구에 여러 차례 위협당했고, 홍건적에 점령당한 적이 있어 방어상에 취약점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도전 등 성리학자들은 이상을 실현할 공간의 재구성이 필요했다. 따라서 천도는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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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교통과 통신망이 발달한 정치와 외교 중심지로 중앙 집중화와 관리체제의 일원화에 효율적이어야 한다.
둘째, 전 근대에는 모든 권력과 기능이 수도로 집중되는 만큼 안전한 방어공간의 확보가 필수적이다.
셋째, 물자의 집결이 편리해 상업과 무역이 활발하고 경제중심지 역할에 효율적이어야 한다. 아테네 등 폴리스나 중국의 난징·카이펑·항저우·베이징, 일본의 오사카·에도 등은 수도이면서 상업도시, 항구도시였다.
넷째, 중요한 문화의 생산지와 집결지이며, 소비지(수요)이면서 공급지여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국가 신앙의 중심이고, 사상적인 의미도 부여해야 한다. 고구려는 수도인 홀본·국내성·평양성에 시조묘 등을 설치했고, 백제와 신라도 이와 유사했다. 수도는 이러한 조건을 고려하고, 국가 정책에 근거해 선택하고 건설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양은 수도로서 어떤 자격을 갖췄고, 어떤 시스템으로 구성됐을까.
서울 지역의 중요성과 수도의 자격은 역사가 증명한다. 백제는 500년(기원전 18년~475년) 동안 수도로 삼았고, 고구려와 신라도 중요시했다. 고려는 남경을 건설했고, 1356년(공민왕 5년)에는 천도 후보지로 삼았다. 실제로 한양에 성과 궁궐을 건설하는 시도까지 했다. 승려인 보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한다면 16개 나라가 조공을 바친다는 도참설을 공민왕에게 주장했다.
조선도 한양을 수도로 선택할 때 풍수지리설을 염두에 뒀다. 개경은 지덕이 쇠패한 땅이라 망국(亡國)의 기지(基地)를 하루라도 빨리 피하려는 미신적 사상인 음양지리(풍수)적 사상의 영향으로 서둘렀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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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도 선택의 우선순위는 백성의 안위와 생활을 보장해주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조건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도(京都)는 지세의 훌륭함은 동방의 으뜸이요, 천연의 요새지다”라고 기록했다. 실제로 한양은 북방 국경선에서 멀리 떨어졌고, 내륙에 위치해 해양 공격에도 방어시간에 여유가 있었으며, 산들이 겹겹으로 막아서 비교적 안전한 환경이다. 태조가 후보 지역인 무악(신촌 일대), 한양(서울 사대문 안), 도라산(판문점 근처) 등을 시찰하고 돌아왔을 때, 조준 등은 한양이 “사방으로 도로의 거리가 균평(均平)하고 수륙의 교통이 잘 되는 곳이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여~”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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