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아침에 휴지된 주식…'짜고 친 고스톱'에 당했나? [류은혁의 기업분석실]

입력 2022-03-13 08:09   수정 2022-03-13 11:14


상장폐지, 투자자라면 누구나 피하고 싶은 단어 중 하나일 것이다. 경영진들의 잘못된 판단이나 내부통제 미흡, 횡령·배임 등의 사건이 발생하면 회사의 주식은 자칫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 소액주주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같이 책임을 떠안게 된다.

상장폐지는 주식시장에 상장한 회사의 상장이 폐지돼 주식시장에서 거래할 수 없게 되는 상태를 의미하다. 주주들은 보유한 주식을 더 이상 주식시장에서 팔 수 없고, 장외시장에서 개인 간 거래를 통해서만 사고팔 수 있다.

상장폐지에는 크게 두 종류다. 회사에 문제(감사의견 거절, 사업보고서 미제출 등)가 생겨서 상장이 폐지되는 경우와 대주주가 스스로 상장폐지를 결정하는 '자진 상폐'가 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사실상 숨겨준 종류가 하나 '더' 있다고 귀띔한다. 바로 '고의 상장폐지'이다.
'무엇'을 감추기 위해 고의 상폐시킬까…회사 장부 숨겨라
'자진 상폐'와 '고의 상폐'는 큰 차이가 있다. 자진 상폐의 경우 대주주가 회사가 상장해서 얻는 이득보다 실이 많다고 판단할 때 선택한다. 규정상 대주주가 전체 주식의 95% 이상을 사들이면 시장에서 자진 상장폐지를 할 수 있다. 합법적으로 정산할 거 다 하고 스스로 시장에서 나가는 것이다.

반면 고의 상폐는 제도상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회계감사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지 않는 수법으로 일부러 감사의견 '거절'을 받은 뒤 회사를 상폐시킨다. 회사의 부정을 감추거나 비상장사로 외부의 관섭 없이 회사를 운영하고 싶을 때 주로 활용된다.

중국 기업인 A상장사는 법정기한까지 사업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아 지난해를 마지막으로 상장폐지되며 역사로 사라졌다. 이 회사는 상장 기간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국내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했다.

문제는 상폐된 시점에서 해당 자금이 어디로 갔는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현재 외국기업들은 공시대리인을 통해 자국내 사업 현황을 공시하고 있다. 그러나 공시대리인에게 공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법적 근거나 권한이 없어 투자자들이 현지에 가지 않는 이상 사실확인 어렵다.

또 다른 기업인 B상장사도 지난해 감사의견 거절로 결국 주식시장에 퇴출됐다. 당시 주주들 사이에선 실소유주가 회사 내 범죄행위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고의적으로 상장폐지에 이르게 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B상장사의 실소유주가 회삿돈으로 인수·합병(M&A)에 몰두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일각에선 B상장사가 투자한 회사들도 실소유자와 관계된 기업으로, 회삿돈을 일부러 빼돌린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결국 실소유자는 자금을 회수할 길이 없게 되자, 감사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지 않는 방법으로 상장폐지를 자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B상장사의 시장 퇴출이 결정되면서 조용히 이 사건이 묻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난해 B상장사의 고의 상폐를 의심했던 한 주주가 정리매매 기간에 주식을 절반 이상 사들이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비상장사지만 주요 주주로 이름을 올리며 회사의 장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후 소송 등 책임 소재를 가리기 위해 법정 공방을 벌였다.
눈 뜨고 코 베이는 고의 상폐, 막을 순 없을까
코스닥업계 인수·합병(M&A) 관계자는 부정을 저지른 경영진 입장에선 이러한 고의 상폐가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고 말한다. 회사 장부를 확인하지 못하면 자금의 용도나 행방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상장사에서 자금을 빼돌렸다가 채워넣지 못하면 사고가 발생하고, 여기서 사고는 상장폐지 사유와 함께 고발 당할 일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며 "이때 투자자나 주주들의 소송이 이어지는데, 차라리 고의로 상장폐지 시켜 자금 행방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고의 상장폐지는 시장에서도 최후의 수단으로 불린다. 부정을 저지르는 경영진 입장에서 상폐는 결국 자금조달의 창구가 막히는 셈이어서다. 주식시장에서는 자금 조달이 쉬워진다. 신사업 추진 등의 명목으로 유상증자,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교환사채(EB)로 외부 자금을 끌어오게 된다. 상장폐지가 되면 결국 이 방법을 활용할 수 없게 된다.

나름의 전문가도 있다. 정리매매 기간 단기차익을 노리고 뛰어드는 이른바 '정리매매꾼(줄여서 정매꾼이라고 부름)'이 있듯이 상장폐지 시장에서도 '고의 상폐꾼'이 존재한다. 이들은 부정을 저지르는 경영진과 협력해 회사의 자산을 빼돌린 뒤 회사를 망가트리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회사가 자연스럽게 개선기간을 거쳐 결국 시장에서 퇴출되게 만든다.

코스닥업계 한 관계자는 "고의 상장폐지를 포함해 시장에서 퇴출되는 기업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경영권 변동이 잦고 목적사업이 수시로 변경되거나 무리한 M&A 추진하는 경우가 많다"며 "고의 상폐 방법이 아니더라도 아는 시장 관계자에게 회사를 싸게 또는 이면 계약으로 넘겨 부정을 숨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개인 투자자(개미) 입장에서는 겉으로 멀쩡했던 회사가 한 순간에 문을 닫는 셈"이라며 "제 아무리 투자는 개인의 몫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작업에 손해를 보는 건 결국 개인들 뿐"이라고 덧붙였다.

류은혁 한경닷컴 기자 ehry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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