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비로 열흘 동안 울진·삼척 지역에 번지던 산불이 213시간43분 만에 잡혔다. 진화대원들의 밤샘 사투에도 꺼지지 않던 역대 최장기간의 화마가 봄비 덕에 완전히 제압됐다. 1973년 기상관측 이후 최저 강수량을 기록한 겨울 가뭄도 다소 해갈됐다. 동해안과 산지의 건조특보 또한 해제됐다.
올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맞는 봄비는 애틋하고 눈물겹다. 박용래 시인이 봄에 내리는 비를 ‘서서 운다’고 표현한 게 이런 까닭이었을까.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수직으로 ‘서서 우는’ 봄비는 그 눈물로 미세먼지도 말갛게 씻어줬다. 그 손길이 섬섬한 ‘버들눈’ 같다. 송수권 시의 ‘뚝방길 위 버드나무에 하얀 젖니를 뱉고 가는 봄비’와도 닮았다. 그 풍경 속에서 송 시인은 ‘아, 들길에 서서 나는 명아주 싹이라도 세어볼 건가/ 강을 건너 북상하는 한 떼의 봄비, 뒷발꿈치가 다 젖는다’고 노래했다. 이럴 땐 ‘세상이 보기 싫다며 손나발을 입에 대고/ 불던 친구’의 얼굴까지 촉촉하게 젖는다.
오랜 기다림 끝의 봄비는 잠결 사이를 딛고 온다. 다른 계절과 달리 가늘고 조용하게 내리는 게 봄비지만, 간절한 사람의 귀에는 특별하게 들린다. 그제 밤의 봄비도 그렇게 왔다. 소설가이자 시인인 심훈이 섬돌과 지붕에 내리는 봄비 소리를 하나님의 건반 연주에 비유한 것처럼 성스럽기까지 했다.
‘하나님이 깊은 밤에 피아노를 두드리시네/ 건반 위에 춤추는 하얀 손은 보이지 않아도/ 섬돌에, 양철 지붕에, 그 소리만 동당 도드랑,/ 이 밤엔 하나님도 답답하셔서 잠 한숨도 못 이루시네.’(심훈 ‘봄비’)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비는 들판과 논밭의 뭇 생명을 북돋운다. 그래서 이수복 시 ‘봄비’도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로 시작한 게 아닌가 싶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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