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수첩의 비밀》은 마치 여러 단면이 겹친 입체파 초상화의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도라 마르가 살았던 세계를 재구성한다. 저자는 1951년 작성된 수첩 속 단서와 이름을 따라가면서 여러 명의 마르와 만난다. 처음 만난 마르는 자유분방하고 고집 세고 성마르면서도 의식 있는 젊은 사진작가다. 좌파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초현실주의 예술가 그룹에서 당당하게 빛나는 뮤즈의 모습이다. 1936년 29세에 피카소를 만나 그의 ‘공식적인 연인’이 되기까지는 그랬다.
다음은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 독자적인 삶을 완전히 포기한, 심지어 복종을 즐기며 사랑받지 못하면 고통스러워하는 ‘우는 여인’의 모습이다. 세 번째는 1945년 피카소에게 버림받고 착란을 일으키다가 결국 광기에 빠진 여인, 네 번째는 오랜 친구인 라캉의 정신분석 치료와 가톨릭 신앙, 그림의 힘으로 다시 일어선 1951년 수첩의 주인공이다.
마지막은 외부 세계와 단절돼 예술과 침묵 속에 칩거하다가 광적인 신앙과 인간혐오에 빠진 반(反)유대주의자 늙은 마르다.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한 유대인의 후손인 저자는 서가에 《나의 투쟁》을 꽂아 놓은 늙은 마르에게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하지만 끝내 밀쳐내지는 못한다. 나치의 위협 속에 일종의 신경쇠약 상태에서 반유대주의자가 됐다고 믿으려 애쓴다.
저자는 젊은 시절이나 노년의 모습이 아니라 수첩에 이름을 써나가던 당시의 마르를 사랑하게 된다. 피카소의 거대한 그늘에서 벗어나 과거를 의연하게 붙잡고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던 ‘도라 마르의 초상’을 애정 어린 눈으로 그려낸다.
감성적이고 주관적인 귀결이지만 감동적이다. 깊은 여운을 남긴다. 작가적 상상력을 더해 묘사한 나치 점령기 파리의 예술가 사회 풍경은 영화를 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 저자가 고백한 대로 “도라의 삶 그대로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도라가 살아간 시대의 삶”이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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