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보증 때문에 집 안 곳곳에 빨간 차압 딱지가 붙여진 건 서막이었다. 주식시장에선 ‘사형 선고’와 다름없는 상장폐지까지 당했다. 회사 매출보다 많은 1000억원의 빚 때문에 눈앞이 캄캄했지만, 처자식을 생각하면 신세 한탄도 사치였다. ‘위기는 기회’라고 다독이며 업종은 물론 유통 채널까지 싹 바꾼 후 묵묵히 전진하기를 13년. 2019년 다시 기업공개(IPO)에 성공하고 매출 1조원대 기업을 일구며 재기에 성공했다. 지난 22일 현대백화점그룹에 경영권을 약 8000억원에 매각한 지누스 창업자 이윤재 회장 얘기다.
이 회장은 “그동안 고통이 컸지만 결국 그 위기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24일 밝혔다. 그러면서 “인생은 위기의 원인이 되는 온갖 문제투성이인데, 그 문제를 푸는 게 사업이고 또 인생”이라며 웃었다.
지누스는 ‘아마존 매트리스’로 유명한 회사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아마존 내 매트리스 부문에서 2014년 이후 8년 연속 1위다. 2006년 미국을 시작으로 캐나다 호주 일본 영국 독일 등 세계 각국에 수출한다.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 1조1238억원, 영업이익 743억원을 올렸다.
승승장구하고 있는 기업 경영권을 돌연 매각한 것은 2세 승계가 힘들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딸은 4년, 아들은 1년 근무했지만 제가 임직원과 함께 이룬 회사인데 자식이라서 경영에 참여하는 건 아니라는 자녀들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며 “숱하게 쓰러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한 걸 겪어 봐서 엄두가 안 났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 회장은 1948년생으로 서른한 살이던 1979년 무역투자진흥공사(현 KOTRA)를 나와 창업한 이후 40년 넘게 경영자로 살아왔다. 500만원으로 지누스 전신인 진웅을 차려 한때 세계 1위 텐트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업체로 키웠다. 하지만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던 중 외환위기 사태가 터져 텐트왕국은 몰락하고 1000억원의 빚을 지게 됐다. 2004년 화의(채권단 공동관리)를 거쳐 이듬해 회사는 상장폐지됐다.
2년 후 직원들과 함께 기존 캠핑산업 기술을 활용한 매트리스 사업으로 승부수를 띄웠다. 매트리스 부피를 5분의 1로 줄여 상자에 담아 미국 전역에 배송하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2010년대 초반 아마존에 입점한 후 입소문을 타면서 ‘아마존 매트리스’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1000억원이라는 빚은 상상하기도, 감당하기도 버거운 대상”이라며 “매일같이 울었지만 마음을 긍정적으로 바꾼 후 거짓말처럼 꼬인 실타래가 하나둘 풀렸다”고 돌아봤다. 이어 “위기 덕분에 캠핑보다 규모가 큰 가구산업에 발을 들이고 전자상거래 시장 확대라는 변화에 올라타 지금의 지누스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새 도전에 나선 덕분에 OEM 회사에서 자체 브랜드를 가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글로벌 기업 창업자이지만 비서도, 기사도 없다. 주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출퇴근한다. “이제 빚은 거의 다 갚고 얼마 안 남았다”는 이 회장은 앞으로 스타트업 지원에 힘을 쏟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그는 “실패한 경험을 많이 공유하면 저처럼 실패를 많이 안 하고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지 않겠냐”며 “동시에 이사회 의장으로서 지누스도 측면 지원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현대백화점과 함께 하면 자라, 유니클로를 넘어서는 글로벌 브랜드로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성남=김병근 기자 bk11@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