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소비자들이 은행을 신뢰하는 이유가 뭘까. 중소형 금융회사는 물론이고 대형 은행도 퇴출될 수 있다는 것을 외환위기 때 경험했지만, 나의 예·적금이나 보험금이 떼일 것이라는 걱정은 뒷전이다. 정부가 뒤에 있다는 믿음에서다. 법으로 보면 예금보험법이 있고, 제도로는 정부 산하 공기관인 예금보험공사가 이 업무를 맡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예금보호 한도는 금융회사별로 최대 5000만원이다. 금액뿐 아니라 보호 대상에서 제외되는 금융상품도 많다. 늘어난 예금 자산, 커진 경제 규모에 맞춰 예금보험 한도를 높이려는 움직임이 정부에 있다. 금융회사가 도산해도 보장받는 예금 한도를 높이려면 예금보험료를 올려야 한다. 이용자와 소규모 금융회사의 도덕적 해이도 우려된다. 국제적으로 낮은 예금보호 한도, 늘려야 할까.
1인당 GDP를 기준으로 국제 비교를 해보면 국내 한도는 1.3배로 매우 낮다. 예금자 1인당 보호 한도가 중국의 경우 50만위안으로 1인당 GDP의 6.8배에 달한다. 호주(25만호주달러)는 이 비율이 3.2배, 미국(25만달러)은 3.7배, 일본(1000만엔)도 2.2배다. 국제 비교를 해도 커진 경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형 은행과 소규모 저축은행, 보험회사, 증권사 등 대부분 금융회사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도 문제다.
코로나 위기가 끝나면서 물가가 치솟고 있다. 인플레이션은 미래의 걱정거리가 아니라 이미 현실화됐다는 분석도 적지 않다. 이런 와중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다시 흔들리면서 경제·금융위기 도래 경고가 계속 이어진다. 금융위기에 뱅크런(bank run: 예금 지급 불능 사태를 우려한 은행 고객들의 무차별 예금 인출)이라도 빚어지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적어도 1억원 정도로 올려야 할 시기가 됐다. 문제점만 보면서 당장 골치 아프다고 지금 해야 할 결정을 미루면 문제점을 키우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예금보호도 그렇다. 예금보호 대상을 5000만원에서 더 올리면 예금보험료가 오를 수밖에 없다. 예금자는 이자에서 떼는 게 늘 것이고, 대출자는 이자에 붙는 게 많아질 수 있다. 당장은 금융회사 부담이 커지겠지만 결국 금융소비자에게 보험료 부담이 전가될 텐데, 한국 금융소비자들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나.
예금보험공사를 내세운 정부의 지급보증은 저축은행·상호금융 등 소규모 금융회사로 하여금 ‘고위험 돈장사’에 나서도록 부채질할 개연성도 있다. 금융회사의 본업인 위험 관리는 소홀히 될 수 있다. 이런 ‘도덕적 해이’ 문제는 예금자에게도 해당된다. 작은 금융회사가 위험한 돈놀이(대출 영업)를 해도 0.1%포인트의 이자만 더 주면 부실한 금융회사로 달려가 예금보호 한도껏 맡길 것이다. 엉터리 금융회사가 망해도 예금을 다 돌려받을 수 있으니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보호 한도를 지금처럼 똑같은 수준으로 일괄 올리면 예금자는 금융사의 건전성보다 고금리만 좇고, 금융회사의 운용책임도 떨어진다. 이런 도덕적 해이를 정부가 조장해선 곤란하다.
보호 한도를 올릴 때 예상되는 부작용은 금융감독 정책에서 운용의 묘로 최소화할 수 있다. 금융감독원 감독·검사에서 더 치밀해지는 것이다. 차제에 정부는 커진 경제 규모를 반영해 다른 ‘5000만원 한도 기준’까지 볼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게 8년째 그대로인 증여세 면세 기준이다. 증여·상속세 문제가 중산층에도 큰 관심사가 된 현실을 정책에 반영하는 게 된다. 이 기준을 올리면 소비 활성화에 도움 되고, 저출산 해결에도 일조할 수 있다.
허원순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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