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전쟁을 치르면서 군사장비를 만들고, 무기를 개량했다. 1448년 신기전이 발명됐는데, 한 번에 15발씩 연속으로 100발을 발사할 수 있고 사거리가 1000m 이상인 신병기였다. 수레 등으로 운반이 가능한 조립식 대포(총통 완구)를 만들고 화포 주조와 화약 사용 방법, 규격 등을 그린 《총통등록》도 발간했다. 해전을 위해 일본인과 유구인의 도움을 받아 개선한 선박을 한강에서 시험운행했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고 했던 태종의 평가처럼 뛰어난 전제군주라고 볼 수 있지만, 세종은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비록 통치기술로도 활용했지만, 농사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이 강했다. 1433년에는 천체를 관측하는 ‘혼천의’와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이듬해에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1442년부터는 측우기를 사용, 전국의 강수량을 골고루 측정해 농사에 도움을 줬다.
그는 조세를 감면하는 정책도 다양하게 구사했다. 전국의 토지를 풍흉(豊凶)에 따라 9등급(연분 9등법)으로, 비옥도를 검사해 6등급(전분육등법)으로 나눴고 20년마다 재측량했다. 이렇게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하는 일은 당연히 대지주인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7년 동안 논쟁을 벌인 끝에 즉위 25년째인 1443년에 시행했다.
그 밖에도 도량형을 정비하고, 조선통보라는 금속화폐도 주조했다. 만약 많이 사용됐다면 실물경제와 화폐경제가 활성화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국력도 신장됐을 것이다.
세종은 지성인들의 말과 성인들의 실천을 국가 정책으로 집행하려 노력한 정치가였다. 그는 백성을 시혜나 훈도의 대상을 넘어 기본적으로 평등하고, 삶의 주체가 돼 존재가치를 구현해야 하는 인간으로 봤다. 이 때문에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기호(code)’를 공평하게 가져야 한다고 판단한 듯하다.
오랫동안 집현전 학자들과 협력해 연구한 끝에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성공했다. 3년간의 검증 기간을 거쳐 1446년에 반포한 훈민정음의 해례에 ‘제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제작한다고 선언했다. 모든 백성이 기호를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한글은 표기방식의 효율성, 신속한 판단과 응용능력 향상에 적합한 기호로, 현대 한국을 세계의 선진국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조선이 건국된 초기는 역동성, 자발적인 창조성을 발현하는 인재들의 시대였다. 세종은 인재를 발굴하고 키워 역사의 인물로 만든 인재 중의 인재인 ‘역사의 천재’였다. 난국에 처한 한국. 세종 같은 ‘역사의 천재’를 기다리기에는 시급한 상황이니, 그를 흉내 낼 정도의 지도자라도 출현하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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