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통화인 루블화의 가치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했다. 서방 국가들의 대러시아 경제 제재가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통화 가치 하락을 방어하기 위한 러시아의 개입에 한계가 있는 만큼 장기적으로는 루블화 가치가 다시 폭락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31일 AP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화 대비 루블화는 전날 85루블 수준에서 거래됐다. 이는 러시아가 한 달여 전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을 개시하기 이전 수준이다. 지난 7일 미국이 러시아 석유와 가스 수입을 금지할 것이란 소식이 전해지면서 루블화 가치가 달러당 약 150루블까지 내려간 것을 고려하면 안정세를 되찾았다는 평가다.
루블화 가치가 반등한 것은 러시아의 극단적인 방어 조치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달 28일 러시아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기존 연 9.5%에서 연 20%로 파격 인상했다. 러시아는 또 루블화를 달러나 유로화로 환전하려는 사람들에겐 엄격한 자본 통제를 가하고 있다. AP통신은 "루블화의 회복은 서방 국가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강력한 제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백악관은 제재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기까지 수개월이 걸릴 것이란 입장이다. 하지만 일부 미국 정치인들은 루블화 가치 반등을 언급하며 더 강력한 제재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팻 투미 공화당 상원의원은 "루블화 반등은 미국의 제재가 러시아 경제를 실질적으로 마비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푸틴은 전쟁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 판매를 전세계적으로 차단함으로써 러시아의 수입원을 차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유럽연합(EU) 국가들이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즉각적인 수입 금지 조치를 내리지 않은 게 '제재 구멍'으로 평가된다. EU는 천연가스 수입량의 40%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어 금수 조치에 대한 우려가 크다. AP통신은 "미국은 이미 러시아산 석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금지했고 영국은 올해 말까지 이를 단계적으로 금지할 것"이라며 "하지만 EU가 이 결정을 따르지 않는 한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볼라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러시아에 대한 보다 강도 높은 제재를 촉구했다. 그는 이날 노르웨이 의회를 상대로 한 화상 연설에서 "러시아에 평화를 촉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제재"라며 "제재 조치가 강화될수록 우리는 더 빨리 평화를 회복할 것"이라고 했다.
루블화 가치가 상승세를 타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추락할 것이란 전망도 많다. 대출자들의 이자 부담을 고려한다면 러시아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계속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AP통신은 "어느 시점에서 개인과 기업은 적은 금액으로 자금을 이동시킴으로써 러시아의 자본 통제를 우회하는 방법을 개발할 것"이라고 했다. 또 "경제학자들은 각종 제재조치가 러시아 경제를 침체시키고 있기 때문에 결국 루블화는 짓눌릴 것으로 예측한다"고 전했다.
허세민 기자 se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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