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도시바·히타치 명운 가른 판단

입력 2022-04-11 17:14   수정 2022-04-12 00:08

요즘 일본 산업계의 최대 관심사는 ‘도시바가 정말 해외에 팔릴까’다. 미국계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베인캐피털이 최근 도시바 인수를 추진하면서 매각은 상당히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가 됐다.

도시바는 회사를 두 개로 쪼개 내년 하반기 각각 재상장한다는 분할안을 제시했다. 회사가 통째로 팔리는 것을 막기 위해 내놓은 카드였다. 하지만 지난달 24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로 구성된 대주주들은 분할안에 퇴짜를 놨다. 시가보다 비싼 값에 보유주식을 사주겠다는 PEF의 제안이 ‘이른 시일 내에 기업가치를 높이겠다’는 도시바의 기약 없는 약속보다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었다.
정면돌파 택한 히타치
도시바는 1960년 일본 최초의 컬러TV, 1985년 세계 최초의 노트북 등을 개발한 기업이다. 소니, 파나소닉과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전자기업이었다. 그런 회사가 해외에 팔릴 상황에 놓인 자체만으로도 굴욕적이겠지만 몰락을 자초한 건 도시바 자신이었다.

일본에서 도시바는 히타치와 자주 비교된다. 두 회사 모두 발전, 철도, 방위산업 등 정부로부터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받는 국가 인프라가 주력 사업이다. 라이벌인 동시에 경영이 방만하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위기에 몰린 것도 같았다. 다만 위기에 대처한 방식이 사뭇 달랐다. 2008년 히타치는 일본 제조업 사상 최대 규모인 7873억엔(약 7조7731억원)의 적자를 냈다. 히타치는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재무구조를 강화하고 신용도 추락을 막기 위해 그해 12월 글로벌 투자가를 대상으로 27년 만에 공모증자를 했다.

히타치의 체질을 완전히 바꿔 회사를 재건하겠다고 시장과 약속하는 조건으로 자금을 수혈받았다. 해외 투자가 설득을 위해 미국을 찾은 가와무라 다카시 당시 사장이 주주들로부터 호통을 듣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래도 히타치는 시장의 비판을 경청하면서 자립하는 길을 택했다.

약속대로 모태기업인 히타치금속, 히타치카세이까지 과감하게 매각해 사업을 재편했다. 지난해에는 일본 전자기업 사상 최대 규모인 1조엔을 들여 미국 정보기술(IT) 대기업 글로벌로직스를 인수했다. 글로벌로직스 인수로 히타치는 제조업에 IT를 접목하는 세계적인 트렌드에서 미국과 유럽의 선두 기업에 뒤지지 않게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장을 속인 도시바
도시바는 손실을 감추는 쪽을 택했다. 2008년부터 7년간 2200억엔의 이익을 부풀렸다. 2015년에야 회계부정 사실이 발각됐고, 2017년 말 뒤늦게 6000억엔 규모의 증자를 실시했다.

이때 해외 행동주의 펀드들이 대거 주주로 들어오면서 경영정상화는 더욱 꼬였다. 회사 경영계획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행동주의 펀드 주주들을 달래기 위해 2018년 이후 주주환원에 쓴 돈만 8500억엔이다. 증자를 통해 이들로부터 수혈받은 자금보다 2500억엔 더 많다. 그러고도 회사가 팔릴 위기에 몰렸다.

2009년 이후 히타치의 주가는 3.5배 상승하는 동안 도시바 주가는 30% 하락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스타 칼럼니스트 가와지리 마코토는 “경영의 시선을 ‘윗분(정부)’에서 시장으로 옮겨 변신에 성공한 히타치와 그렇지 못한 도시바의 차이가 회사의 운명을 갈라놓았다”고 지적한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의 시대가 열리면서 시장 및 이해관계자와 눈높이를 맞추는 경영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경영 환경의 변화 속에서 한국의 대표 기업들이 도시바가 아니라 히타치의 길을 걷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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