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식탁 옮겨 온 듯…어린 시절 '동심으로의 초대'

입력 2022-04-12 17:33   수정 2022-04-13 00:48

작은 몸을 구부린 채 어딘가에 숨는 건 아이들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식탁 의자 벽장 침대 밑에 기어들어가 숨바꼭질하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미국 현대미술가 로버트 테리언(1947~2019년)은 이런 어린 시절의 기억을 어른들에게 되살려주는 작가로 통한다. 실제 크기보다 3~5배 확대된 식탁과 의자 등을 설치, 그 안에 들어갔을 때 극도로 작아진 우리의 몸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마치 어린 시절 숨바꼭질을 할 때처럼.

3년 전 폐암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테리언의 회고전 ‘앳 댓 타임(At that time·그 시절)’이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12일 개막했다. 작고 후 열리는 첫 전시다.

그는 일상의 풍경을 아주 크게 확대하거나 아주 작게 축소한 대형 설치 작품들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휘트니미술관, LA 폴 게티 미술관과 파리 퐁피두센터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들여놓았다. 이번 전시는 그가 1990년대 대형 스튜디오를 만들기 전에 끄적이던 작은 스케치부터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초소형 사진에 이르기까지 일생의 대표작들로 채워졌다. 조각 14점, 평면 작품 28점, 사진 10점 등 총 52점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선희 큐레이터는 “그의 작품은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에서 출발한다”며 “그는 매우 작은 어린 시절의 사건들을 매우 크게 확대한 ‘테러리스트’ 같은 태도를 지녔지만, 실제론 작고 사소한 걸 소중하게 여기며 수도자 같은 자세로 작업했다”고 말했다.

테리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건 초대형 조각 작품이지만, 그가 남긴 작품의 상당수는 드로잉과 사진 판화였다. 작품의 소재는 눈사람, 눈물방울, 수염, 구름, 디즈니 만화 속 주인공의 모습, 더치 도어(아래 위가 나눠져 열리는 시골의 문) 등 누구나 한 번에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일상적인 모티브를 여러 소재로 단순하게 표현했지만, 그 안엔 예외 없이 스토리를 담았다. 눈사람은 시카고에서 태어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그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리워했던 오브제다. 작가는 생전에 “눈사람은 나의 자화상과 같다”고 했다. 이 밖에 할머니가 메모로 남긴 ‘무화과 잼 만드는 법’이나 좋아하는 소설가의 얼굴로 만든 캐릭터 ‘조이스’도 전시에 등장한다.

누군가 쓰다 버린 낡은 가구와 접시 등도 그의 손을 거치면 작품이 됐다.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한 로스앤젤레스 앰버서더호텔이 문을 닫기 전 재고 처리할 때 구한 쟁반과 접시 등도 예술의 소재로 썼다. 침대 매트리스를 받치는 팔레트 철도 ‘침대 밑에 가려진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물’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매개체로 활용했다.

그의 조각 작품은 관객이 존재해야만 의미를 갖는다. 하이라이트는 높이만 3m에 이르는 테이블과 의자 작품 ‘녹색 접이식 탁자와 의자(2008)’. 그 안에 들어가면 멀리서 볼 때와 다른 짜릿한 연극적 경험을 할 수 있다. 딘 아네스 로버트테리언재단 디렉터는 “테리언은 친숙한 사물을 ‘슈퍼 사이즈’로 만들 때 어떤 경험을 줄 것인가 끝없이 고민했다”며 “누구나 아는 소재이기 때문에 훨씬 더 섬세하게 고르고, 정교하게 계산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에는 이름이 없다. 모두 ‘무제’다. 작가는 관람객이 작품에 집중할 수 있도록 어떤 설명도 붙이지 않았다. 테리언은 과거 “관람객에게 답을 주고 싶지 않다. 생각의 경계를 허물며 더 많은 궁금증과 다층적인 해석을 하길 바란다”고 했다. 이번 전시를 찾은 관람객이 100명이라면, 이들이 각자의 가슴 속에 묻어뒀던 100가지 옛 기억을 꺼내볼 수 있도록 돕는 게 테리언의 의도였다는 얘기다.

가나아트센터는 대형 조각 작품의 이동과 설치를 위해 건물 전면부를 뜯었다 다시 붙이는 대공사를 해야 했다. 전시는 5월 5일까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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