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위 하얗고 작은 두 손. 헝가리 출신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1811~1886)의 ‘라 캄파넬라’를 부지런히 연주하고 있다. 현란한 기교의 곡을 노련하게 연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의 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름이 가득하다. 이어 카메라는 주인공의 모습을 비춘다. 87세(2019년 기준) 백발의 피아니스트 후지코 헤밍이다.
강렬한 오프닝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파리의 피아니스트: 후지코 헤밍의 시간들’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다. 작품은 60세라는 늦은 나이에 데뷔하고, 올해로 90세가 돼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노(老) 피아니스트의 소박하고 담대한 여정을 담아낸다.
카메라는 거장으로서의 면모보다 집안의 인테리어나 소품, 동물 등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일상의 모습을 먼저 비춘다. 이어 공연장에서 리스트·쇼팽·드뷔시·거슈윈 등의 음악을 연주하고 기립 박수를 받는 모습을 삽입해 보여준다. 일상과 무대의 교차된 편집은 후지코라는 인물이 얼마나 위대한 음악가인지를 점차 강조한다.
작품은 동시에 후지코의 삶을 관통하는 고통과 슬픔을 깊숙하게 파고든다. 그 이야기는 후지코가 직접 쓴 일기와 내레이션으로 엮어낸다. 후지코는 스웨덴 출신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평생 ‘혼혈아, 이방인’이란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6세에 피아노를 시작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어머니로부턴 항상 ‘바보’라는 구박을 받았다. 그러나 후지코는 눈물 짓거나 화내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며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다.
청년이 된 그는 베를린 예술대학에 진학해 35세 때 번스타인의 후원으로 독주회를 열 기회도 얻었다. 하지만 삶의 고통은 유년 시절에서 끝나지 않았다. 연주회 직전 심한 감기를 앓고 청력을 잃으며 연주회가 무산됐다. 이후 왼쪽 귀만 40% 정도 청력을 회복한 채 살아가던 중 60세가 돼서야 기적처럼 데뷔하게 됐다. NHK 방송에 출연하며 이름이 알려진 것이다.
작품은 그 지난한 과정을 버티고 기다린 후지코의 강인함을 담아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영화평론가이자 CBS 아나운서인 신지혜는 “그야말로 후지코의 ‘시간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라며 “숙연하고도 단단한 느낌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필사적으로 쳐야 하는 곡이라서 연주자의 내면이 저절로 드러난다. 나는 내가 최고의 연주를 하고 있다고 믿고 연주한다.”
격정적인 음악이지만 그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미국의 아시안 영화 전문 매체 ‘아시안 무비 펄스’는 “품위가 있으면서도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고 분석했다.
연주 장면을 비롯해 클래식 애호가들이 보면 좋아할 요소가 많은 작품이지만, 다큐멘터리 자체의 완성도는 다소 떨어진다. 편집이 매끄럽지 못해 과거 이야기와 현재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못하는 건 아쉽다. 월드 투어를 하며 여러 도시를 오가는 모습도 조각조각 편집돼 단절된 느낌이 강하다. 개봉은 이달 27일.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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