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출범하는 윤석열 정부에서 보험업계 내 해묵은 해결 과제로 여겨져 온 '실손의료보험(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실현될 것이란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새 정부에서 가장 먼저 시행해야 할 생활밀착형 과제로 선정되면서다. 그간 의료계의 반발로 공회전을 거듭하며 4000만명에 달하는 가입자의 불편함을 유발했던 실손보험 청구 절차가 대폭 개선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23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디지털플랫폼정부 태스크포스(TF)에 따르면 지난 11~14일 국민소통 플랫폼 '국민생각함'을 통해 실시한 14개 생활밀착형 후보 과제의 우선 시행순위 조사에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총응답자 4323명 중 2003명(9.27%)의 선택을 받아 1위로 선정됐다. 이어 모바일 주민등록증(1954명·9.04%)과 모바일 지도 애플리케이션(앱) 기능 강화(1891명·8.75%) 등이 뒤를 이었다. 이번 조사는 응답자의 5개 항목 복수 응답이 허용됐다.
실손보험은 국내 가입자만 4000만명에 달해 '제2의 국민건강보험'으로 불린다. 그러나 가입자가 몸이 아파 병·의원에서 치료받게 되면 보험금 신청서는 물론 진단서, 진료비 영수증 등 서류를 일일이 발급받아 제출해야 한다. 절차의 불편함과 번거로움이 워낙 크다 보니 실손보험금 청구 자체를 포기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녹색소비자연대전국협의회·소비자와함께·금융소비자연맹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가입자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총응답자의 47.2%가 실손보험을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 중 30만원 이하 소액청구 건은 무려 95.2%를 기록했다. 업계 안팎에서 가입자가 종이 서류를 하나하나 받급받고 제출하는 방식을 탈피하고 전산망을 활용해 보험금을 자동으로 받도록 하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는 2009년 국민권익위원회가 제도 개선을 권고한 지 13년째 공회전만 거듭하고 있다. 20대 국회에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관련 입법이 추진됐으나 끝내 무산됐다. 21대 국회에서는 고용진·김병욱·전재수·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 등이 5개의 유사한 법안을 내놓았으나 이 또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법안의 골자는 보험 계약자가 요청하면 의료기관이 보험금 청구에 필요한 서류 전송에 응하도록 하는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국회뿐만 아니라 금융위원회가 2015년 추진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또한 무산된 바 있다.
국회의 법안 발의와 금융당국의 조치에도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좌절되는 데에는 의료계가 강하게 반발하는 탓이 크다. 의료계는 실손보험이 보험사와 가입자 간의 사적 계약이란 점을 들어 제3자인 의료기관에 보험금 지급을 위한 서류 전송을 법적 의무화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개인의 의료 선택권을 제한하고 재산권 침해, 개인정보 유출 우려가 있는 사안이란 게 의료계 측 입장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비급여 의료 정보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으로 집합될 경우 정부가 비급여 관련 비용 통제 근거로 정보를 사용할 것을 우려한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인수위는 민간 전문가와 논의를 거쳐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의 정책 구현 가능성을 판단하겠다는 입장이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에 대한 국민의 수요를 확인한 만큼, 정책 실현에 필요한 세부 내용을 면밀히 파악하겠다는 것이다.
인수위 관계자는 "14개 생활밀착형 후보 과제 중 1위로 선정된 사안은 그만큼 국민의 수요와 관심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정책으로 구현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면서도 "정책 실현 가능성, 문제 해결 방안 등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전문가 논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새 정부가 추진할 국정과제에 대한 상세 내용은 다음 달 초에 발표될 예정이다.
김수현 한경닷컴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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