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 교수 "180조 조달시장을 혁신 놀이터로…정부가 세상에 없던 제품 사줘야"

입력 2022-04-22 17:48   수정 2022-04-23 02:14


“아이폰에 장착된 인공지능(AI) 기술 ‘시리’를 처음 상상한 건 스티브 잡스가 아니라 미국 국방부였습니다. 대한민국이 기술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정부는 ‘채점자’가 아니라 ‘출제자’가 돼야 합니다. 세상에 없는 도전적 과제, 즉 ‘최초의 질문’을 기업에 던지고, 답을 찾아낸 기업의 제품을 정부가 사주는 겁니다. 연간 180조원에 달하는 공공조달 시장을 이렇게 ‘혁신의 놀이터’로 만들어야 합니다.”

《축적의 시간》 《축적의 길》로 대한민국에 ‘축적’ 신드롬을 일으켰던 이정동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전 청와대 경제과학특별보좌관)가 5년 만의 단독저서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이 교수는 22일 한국경제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최초의 질문이 없는 축적은 퇴적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는 “한국 기업들은 그동안 선진국 기업을 따라잡는, 어찌 보면 정답이 있는 문제만 풀었다”며 “이제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선진 기업 수준에 이른 만큼 스스로 지도를 그려야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규제 철폐보다 업데이트”
이 교수는 기업뿐 아니라 정부에도 ‘최초의 질문’이 필요한 때라고 진단했다. 이 교수는 “새 정부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며 “단순히 기업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것을 넘어 국가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정부가 해야 할 역할 중 하나로 ‘공공조달 시장을 활용한 혁신기업 지원’을 꼽았다. 현재 국내 공공조달 시장은 고만고만한 제품 중 가장 싼 제품을 낙점하는 최저가 입찰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보다는 저렴한 가격에 방점을 둔다는 얘기다.

공공조달 시장을 ‘기업 혁신의 장’으로 만들려면 가격보다는 아이디어에 더 많은 점수를 줘야 한다는 게 이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정부가 중소기업 등에 먼저 아이디어를 주고, 해당 제품을 구매하는 식으로 ‘응원’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정부가 일정 물량을 보장해주면 해당 기업들은 안정적으로 연구개발(R&D)에 투자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이어지는 이 교수의 설명.

“가끔씩 미국 중소기업기술혁신연구(SBIR) 웹사이트를 둘러봅니다. 미국 정부와 공공기관에서 해답을 찾고 싶은 ‘최초의 질문’을 올리면, 기업들이 이런 문제를 푸는 곳이죠. 당연히 좋은 답을 올린 기업에는 선물을 줍니다. 정부가 그 회사 제품을 사주기도 하고, 민간 투자를 받을 수 있도록 연결도 해주죠. 이런 ‘문제은행’에 쌓인 질문이 1만5000개가 넘습니다.”

제도 정비도 국가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이 교수는 강조했다. 그는 “창업을 꿈꾸는 청년이든, 기존 기업이든 누구나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는 환경부터 갖춰야 한다”며 “기업의 신산업이 규제에 가로막히는 일이 반복되면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고 했다. 이 교수는 “지금 필요한 건 ‘규제 철폐’가 아니라 ‘규제 업데이트’”라며 “수많은 규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시대에 뒤처진 규제는 없애거나 현 상황에 맞게 정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은 시도가 쌓여 혁신이 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미·중 무역갈등 등 글로벌 가치 사슬이 흔들리는 일이 생길 때마다 한국은 “누구 편이냐”는 질문 앞에 선다. 이 교수는 “모두가 할 수 있는 걸 나도 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언제든 판에서 퇴출될 수 있다”며 “언제나 다른 나라의 ‘러브콜’을 받으려면 대체불가능한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대체불가능한 영역 중 하나로 국제표준 선점을 들었다. 국제표준은 나라마다 다른 공업 규격을 하나로 표준화하는 것을 말한다. 아직 이렇다 할 주인이 없는 첨단 분야의 표준을 특정 국가가 선점하면 해당 산업의 주도권을 쥘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이 교수는 “국제표준을 관장하는 3대 기구인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국제표준화기구(ISO) 요직을 모두 중국인이 차지하고 있다는 건 우리에게 많은 걸 시사한다”며 “우리도 국제표준을 잡는 데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했다.

이 교수는 이렇게 ‘최초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은 다음에는 시행착오를 통한 ‘축적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쉽게 얻을 수 없는 도전적인 과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번에 내놓은 《최초의 질문》은 5년 전 출간한 《축적의 시간》의 애프터서비스 버전이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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