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자산' 채권의 배신…글로벌 금리 급등에 가격 폭락

입력 2022-05-16 17:14   수정 2022-05-17 01:27

‘채권의 배신’ ‘채권 대학살기’. 최근 채권시장에서 들리는 신음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주식의 위험성을 줄여주던 채권이라는 울타리가 사라졌다”고 보도했다. 주식과 채권 가격이 보기 드물게 동반 하락해 투자자들이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것이다. “채권 수익률이 -20% 이상”이라고 눈물짓는 직장인이 부지기수다. 주범은 물론 금리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기준금리 인상이 각국 채권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금리와 채권 가격의 관계
A가 B에게 1000만원을 빌려주고 1년 뒤 돌려받기로 했다고 하자. 금리는 연 8%로 정했다. 이런 내용을 적은 문서가 채권이다. 이런 것은 기업도, 정부도 발행할 수 있다. 회사채, 국채라는 것이다.

A는 1년 뒤 B로부터 이자를 합쳐 1080만원을 받을 수 있다. 1000만원을 주식에 투자한 C보다 A는 덜 불안하다. 주식시장은 1년 뒤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채권은 만기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요즘 같은 금융 환경에선 채권이 배신을 한다. 금리 변동폭이 클 때 채권 투자로 큰 손해를 볼 가능성이 커진다. 인플레이션(고열)이 심해져 중앙은행이 기준금리(해열제)를 올려야 할 환경이다. 미국은 8.5%를 넘나드는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고, 이에 놀란 Fed가 기준금리를 잇달아 올리고 있다.
울고 있는 A들
A와 B가 거래하는 중에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렸고, 시장 금리가 연 20%로 상승했다고 하자. 이제 1000만원을 빌려주면 1년 뒤 1200만원을 받을 수 있다. 연 8%짜리 채권을 가진 A는 기존 채권을 팔고 새로 나온 연 20%짜리 채권을 사고 싶어진다. A는 D에게 자신의 채권을 사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D는 연 8%짜리 채권을 1000만원에 사려 하지 않는다. D는 1000만원을 연 20%짜리 채권에 투자하려 한다. 당연하다. 그래서 D는 A에게 채권을 900만원에 팔라고 한다. 만기에 1080만원을 받는 A의 채권은 900만원에 매수해야 시장 금리(연 20%)만큼의 수익률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메커니즘에 따라 시장 금리가 상승하면 채권 가격은 하락한다. 금리가 더 오를 가능성이 높다면 A는 싼 가격에라도 손절해야 한다. 그러면 채권시장에서 A들은 줄줄이 손해를 본다. 채권시장에서 비명이 들리는 이유다. 시장 금리가 하락하면 정반대 상황이 벌어진다. 시장 금리가 연 3%로 하락하면 연 8%로 약정한 1000만원짜리 채권의 가치는 1050만원 수준으로 오른다.
인플레이션은 채권의 적
1980년대에도 요즘과 비슷한 채권 대학살, 채권의 배신이 있었다. 미국에서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던 때다. 당시 Fed 의장 폴 볼커는 기준금리를 연 20%대로 올렸다. 채권시장은 정확하게 작동했고, 채권 투자자들은 대참사를 겪었다.

채권 투자의 최대 리스크는 디폴트 즉 채무불이행 위험이다. 돈을 빌린 사람(채권 발행자)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거나 파산해 약속한 원리금을 갚지 못하면 채권 투자자는 돈을 날리게 된다. 채권의 디폴트 위험은 발행 주체에 따라 다르다.

일반적으로 정부가 발행한 채권(국고채)은 기업이 발행한 채권(회사채)보다 부도 위험이 낮다고 평가된다. 대신 금리도 낮아 투자자 입장에서 만기에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이 적다. 정부 채권도 안전하긴 하지만 위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달 스리랑카가 디폴트를 선언했고 러시아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이 대외 채무 상환을 중단한 적이 있다.

회사채의 부도 위험과 이자율은 기업의 재무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국채와 회사채의 이자율 차이를 신용스프레드라고 한다. 재무 상태가 나쁘고 신용도가 낮은 기업일수록 신용스프레드가 커져 회사채 이자율이 높아진다. 위험한 기업은 돈을 싼값에 빌리기 어렵다는 얘기다.

채권 금리는 보통 만기가 길수록 높다. 경기가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지면 단기 금리는 낮아지고 장기 금리는 높아진다. 경기가 둔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면 단기 금리가 장기 금리보다 높아지기도 한다. 단기 금리가 장기 금리보다 높아지는 금리 역전은 일반적으로 경기 둔화 신호로 해석된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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