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코인)로 돈을 버는 것은 얼마나 정의로운 일일까. 지난해 11월 전 세계 암호화폐 시장의 시가총액은 무려 3조달러에 달했다. 지구상의 모든 자동차를 사고도 남을 정도의 돈이다. 코인이 없는 세상과 자동차가 없는 세상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할까.
테라·루나의 폭락 사태는 부나방 같은 투기꾼들의 필연적 폭망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근본적 의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블록체인이 우리에게 어떤 미래를 약속하고 있느냐다. 이 문제는 코인의 미래와도 직결돼 있다. 코인이 내재가치를 확보하는 배후가 블록체인이라는 생태계이기 때문이다. 테라를 만든 권도형 테라플랩스 대표는 탈중앙화 금융시스템을 일컫는 ‘디파이(DeFi·decentralized finance)’를 내세웠다. 정부 통제나 금융사의 중개 기능 없이 블록체인 기술만으로 모든 금융거래를 가능케 하는 생태계다. 거래의 중심은 코인이었다. 코인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거래 횟수가 늘수록 디파이 생태계가 성장하고 코인의 가치도 올라간다는 구조를 표방했다. 하지만 정작 코인에 투자하는 많은 사람은 이 생태계의 얼개나 지속 가능성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가격 등락만 쳐다봤다. 코인 생태계가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야 가격이 오를 텐데, 그런 종류의 시장 정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개발자들도 많은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블록체인의 확장보다는 당장 발등의 불인 코인 가격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쏟았다. 예금이자를 대출이자보다 훨씬 높게 설정한 코인 금융은 블록체인 혁신으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조희팔식 다단계 수법’을 암호화폐 확장판으로 채택한 것이었다. 한때 50조원이 넘던 자산이 불과 1주일 만에 공중분해된 것은 도미노 환매 사태로 실체 없는 쓰레기 자산들의 민낯을 충격적으로 드러낸 라임펀드 사기 사건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테라 폭락이 조희팔 사태, 라임 사태와 다른 게 있다면 장본인이 도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참 희한한 일이다. 권도형은 여전히 블록체인 세계의 당당한 일원이다. “내가 만든 발명품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짧은 성명서에는 누군가에게는 파탄이요 재앙이었을 이번 사태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책임이 보이지 않는다.
코인 벼락부자의 미몽에 젖어 있는 개발자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돈을 버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돈을 벌어놓아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결판론적 세계관에 포획돼 있다. 창의성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돈이 세상을 바꾼다는, 누구보다 꼰대적인 사고다. 필자가 20대였던 1980년대, 문과생들은 이공계 학생들을 ‘무식한 공돌이’라고 놀렸었다. 말이 안 통한다고 이죽거렸다. 지금은 거꾸로다. 알고리즘이나 선택정렬, 블록체인 스테이블코인 같은 단어는 그들의 전유물이다. 젊은 개발자들은 자기들끼리 어울리고 소통한다. “코인은 금과 다른 것 아니냐”고 따지는 문과생들을 무식하다고 타박하고 경멸한다. 본인들의 상상력으로 ‘발명’한 가상자산에 온 세상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라는 우월감을 느낀다.
블록체인이 새로운 세상을 펼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양자컴퓨터 같은 동행기술도 강력하다. 하지만 인류를 거리와 공간의 제약에서 해방시킨 자동차산업이 일군 문명사적 전환과 비교할 수는 없다. 세상 모든 자산과 거래를 디지털로 저장하는 것이 블록체인의 궁극이다. 하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가. 막대한 비용은 누가 조달하는가. 누가 그런 세상을 원하는가. 블록체인은 아직 이런 기본적 질문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있다. 탈중앙 블록체인에 대한 신뢰는 각국 정부나 중앙은행의 견제가 아니라 일부 개발자의 탐욕과 거짓말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코인은 고유의 가치 창출 능력을 의심받기 시작했다. 기술지상주의와 배금주의에 빠진 개발자들은 새로운 세상의 주역이 될 수 없다. 이타주의와 윤리의식을 배제한 개발은 거짓말과 사기로 단죄된다. 그것이 시장의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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