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5월 31일 18:10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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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섹(싱가포르 정부 소유 투자회사)이 스폰서 역할까지 도맡았죠.”
최근 한 리츠(REITs·부동산투자회사) 업계 임원이 미팅 중 꺼낸 얘기다. 아시아 2위 규모인 싱가포르 리츠 산업의 고성장 배경을 설명하면서다. 안정적인 금융상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리츠 산업의 성장에 정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싱가포르리츠협회(REITAS)에 따르면 2021년 말 현재 상장 리츠(S-REIT) 시가총액은 48개 860억달러(106조원)에 달한다. 전체 시가총액의 13% 규모다. 일본(1580억달러)을 빼면 아시아에서 2위 규모를 자랑한다.
국민 노후자산 증식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싱가포르 상장 리츠 수익을 추종하는 i엣지 지수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투자자에게 배당금을 포함해 돌려준 수익이 연 7.5%에 달한다. 해외 자산을 보유한 리츠의 시가총액이 전체의 87%로 상품 구성도 다양하다.
한국 시장은 부산보다도 작은 싱가포르와 비교할 때 부끄러운 수준이다. 리츠의 출발점은 2001년 ‘부동산투자회사법’을 제정으로 싱가포르(2002년)와 비슷했지만, 상장 리츠 규모는 지난 4월 말 현재 19개 약 9조원으로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이처럼 커다란 격차를 만들어낸 주체는 정부다. 싱가포르 정부는 초기부터 리츠의 주요 투자자(스폰서)로 참여해 투자자에게 신뢰감을 주는 데 주력했다. 테마섹홀딩스와 같은 정부 소유 기관뿐만 아니라 공기업과 국부펀드까지 다양한 제도와 세제 혜택으로 활성화를 뒷받침했다.
반면 한국은 2011년부터 장기간 암흑기를 겪어야 했다. 다산리츠의 배임 사건, 골든나래리츠의 주가 조작, 삼우리츠의 가장 납입 등이 연달아 발생했기 때문이다. 정부와 유관 기관의 감시 소홀로 되레 ‘믿을 수 없는 시장’이라는 선입견만 남겼다.
상장 리츠 시장의 장기 공백은 MZ세대로 불리는 2030의 묻지마 투기 실태에도 일조했다는 점에서 더욱 뼈아프다. 최근 암호화페 ‘루나’ 폭락 사태로 인한 피해가 대표적이다. 정기예금 이자가 2%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 이들의 성실한 자산증식 의욕을 꺾어놨다는 해석이 많다.
다행히 한국도 정부 노력을 계기로 2018년 이후 상장 리츠 시장이 빠른 성장세다. 하지만 여전히 금융위원회와 국토교통부 ‘두 시어머니’가 존재하고, 각각의 규정을 따르는 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업계 참여자들이 많다.
특히 지금처럼 인플레이션(물가상승) 우려가 큰 환경에서 안정적인 배당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리츠 활성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싱가포르처럼 정부 유관 금융회사의 참여를 늘리고 배당소득세 감면 혜택 등을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다. 한국리츠협회에 따르면 작년 국내 운용 리츠의 평균 배당수익률은 6.2%다.
한국은 ‘완전고용’ 싱가포르와 달리 청년 실업률이 높고 급여는 짜다. 신혼부부의 주거비용 부담도 훨씬 크다. 여기에 안정적인 자산증식 수단마저 부족하다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작년 싱가포르에서 만난 한 글로벌 금융회사 임원은 젊은 사원들이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이런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꾹 참는다고 했다.
“한국 청년에게 비하면 너희 고민은 고민도 아냐.”
이태호 기자 t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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