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잡는 '모래주머니' 3000개 더 있다

입력 2022-06-14 17:25   수정 2022-06-15 10:22

국내에서 판매하는 기능성 화장품은 수입 제품에만 ‘아토피 전용’이 표시돼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아토피 개선 효과를 화장품에 표시할 수 없도록 한 규제를 2020년 부활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선 찾기 힘든 규제다. 식약처는 박근혜 정부 때인 2015년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 문제로 이 규제를 철폐했다가 정권이 바뀌자 소비자 보호를 내세우며 돌변했다. 박근혜 정부가 제거한 대표적 ‘손톱 밑 가시’로 홍보됐던 이 규제는 이렇게 다시 국내 화장품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규제와의 싸움이 또다시 시작됐다. 이번 차례는 윤석열 정부다. 윤 대통령은 지난 13일 “규제개혁이 곧 국가 성장”이라며 “전 부처가 규제 완화에 나서라”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를 ‘모래주머니’라고 칭하고 이를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심판대에 오르지만 좀비처럼 살아남는 규제들을 없애야 한다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대통령의 주문에 한덕수 국무총리도 나섰다. 한 총리는 14일 “정부 규제혁신의 최고 결정기구로 규제혁신전략회의를 신설하겠다”며 규제개혁의 구체적인 추진 방안을 제시했다. 국무조정실은 전날 에너지·신소재, 무인이동체 등 신산업 분야 규제 33개를 개선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모래주머니 제거의 신호탄을 쐈다.

그럼에도 경제계는 여전히 반신반의한다. 과거 정부를 믿었다가 ‘양치기 소년’ 신세가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 정부 출범 후 지금까지 파악한 중앙부처 차원의 기업 규제만 약 3000개다. 경제계는 이보다 더 많은 모래주머니가 기업을 짓누르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유정주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정책팀장은 “상법상 지배구조 규제가 기업활동을 옥죄고 있지만 정부 기준으로는 규제가 아닌 것으로 분류된다”며 “규제심사 자체에 빈틈이 많다”고 지적했다.

지방자치단체 규제가 더 심각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기업들은 3.3㎡ 규모 창고를 짓는 데도 지자체 도시계획위원회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강영철 전 국무조정실 규제조정실장은 “지자체 조례에 의해 부산에선 부산 기업의 LED(발광다이오드)를, 광주에선 광주 기업의 LED를 우선 구매한다”며 “경쟁력 없는 ‘스몰 챔피언’을 양산하는 규제”라고 말했다.
공무원 한마디에 코인사업 올스톱
'그림자 규제'에 신음하는 기업들
가상화폐·대체불가능토큰(NFT) 등 가상자산 관련 사업을 추진하던 카드회사들은 최근 날벼락을 맞았다. 금융위원회 업무를 위임 받은 여신금융협회에서 국내 모든 카드사의 가상자산 관련 마케팅을 중단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관련 약관 및 광고 심의 접수가 잠정 중단됐다. 업계 관계자는 “사실상 사업을 ‘올스톱’하라는 금융위의 지시”라며 “언제 어떻게 사업이 가능할지 미지수”라고 토로했다.

기업들을 옥죄는 ‘그림자 규제’의 한 사례다. 더욱이 규제 개혁을 외치고 있는 윤석열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다. 구태언 법무법인 린 변호사(리걸테크산업협의회장)는 “행정지도는 엄밀히 따지면 민간 기업에 대한 공무원의 직권남용죄 여지도 있는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윤석열 정부의 규제개혁에 대한 경제계의 기대는 높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14일 전국 4년제 대학의 경제·경영·행정학과 교수 2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새 정부에서 기업의 규제 환경이 ‘개선될 것’이라고 전망한 응답자가 68.5%에 달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의구심도 제기된다. 국무조정실 규제정보포털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0일 취임한 뒤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 심사를 받기 위해 대기 중인 규제만 40개에 달했다. 정부의 ‘규제 관성’이 정권이 바뀌어도 유지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날 브리핑을 통해 과거 정권에서 규제개혁이 제대로 되지 않은 주요 이유로 “정권 초기엔 대통령의 의지가 강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계속 의지를 갖기 어려웠다”는 점을 들었다.

전문가들도 비슷한 지적을 하고 있다. 길홍근 한국규제학회 부회장(전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사무총장)은 “과거 어느 정부 때보다도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와 비전이 필요한 때”라며 “일본은 아베 신조 총리가 취임한 뒤 직접 드라이브를 걸면서 규제개혁에서 한국을 훨씬 앞서나갔다”고 말했다.

규제개혁의 방향을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과거 정부에서 규제 수를 줄이는 식으로 규제개혁에 나섰더니 공무원들이 같은 내용의 허가를 신고로 바꾸는 식으로 ‘무늬만 개혁’을 하거나 민관협력기구를 통한 우회 규제로 방식만 바꿨다”며 “규제 완화의 숫자에 현혹되지 않는 실질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도원/조미현 기자 van769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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