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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역대 황제들은 국어(만주어)와 기사(말타면서 활쏘기) 그리고 조상들의 소박한 생활양식을 지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만주족이 고유의 전통을 잃지 않도록 하는 데 많은 신경을 쓴 것이다. 이는 만주족이 한족에 동화되면서 중국 지배의 근간인 전쟁 수행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우려한 것이었다. 특히 중국 대륙에서 만주족의 지배 체제가 확고해진 건륭제 시대가 되면 만주족 기인들에게 자존심을 지키고 만주족 고유의 방식을 유지할 것을 촉구하는 칙령이 계속해서 반포됐다. 중국 대륙 정복의 근간이고, 청나라 성공의 DNA였던 군사력의 골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건륭제(사진)는 특히 기마술과 궁술을 중시했다. 말을 탄 상태에서 활 쏘는 기술을 만주족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기본 덕목으로 여겼다. 이 같은 기술이 쇠락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 조상의 신뢰를 배신하는 행위였다. 건륭제는 “건국 시대부터 우리나라는 기마 상태에서 활을 쏘는 궁술을 매우 중시했다”며 “오래된 관습과 제도는 엄격한 노력을 통한 연습과 체득을 통해 공손하게 수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런 강조에도 만주족의 실상은 그의 의도와 계속해서 멀어져갔다. 당장 주변 인사들부터 필수 코스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다.
이와 함께 1741년 한동안 뜸했던 연례 수렵대회를 재도입하고 확대했다. 매년 가을 열하 북쪽의 무란 수렵지에서 대규모 수렵활동을 하는 것은 만주족을 훈련시키는 최선의 방법으로 포장됐다. 실제 3000명 넘는 군대가 동원된 사냥은 실전을 방불케 했다. 혈연관계를 맺은 몽골 왕족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목적도 곁들였던 이 수렵 활동은 건륭 연간에 50회 이상 계속됐고, 건륭제가 84세 되던 1794년 마지막 수렵이 거행됐다.
이 같은 극약처방과 함께 건륭제는 수시로 병사들의 ‘기량’을 직접 검사하고 나섰다. 불시 점검 결과 때론 기뻐하기도 했지만 실망할 때도 적지 않았다. 1752년 황제가 예고도 없이 궁술 연습장에 들렀다가 수많은 고위관료가 쏜 화살이 표적 근처로 날아가기는커녕, 표적을 완전히 벗어나 땅바닥으로 향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격노한 건륭제는 그들을 심하게 질책하고, 1년 치 급료를 벌금으로 부과했다. 일부는 관직을 박탈해버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국가 전체가 활력을 잃으면서 건륭제의 조치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오히려 부정부패와 나태가 곳곳을 좀먹어갔다. 건륭제 후기 황제의 총신이던 화신의 부정 축재 사건이 대표적이다. 만주 기인 출신으로 특별히 내세울 학력이 없었던 화신은 20대에는 별 볼 일 없는 근위병으로 연명했다. 그러다 1775년부터 늙은 황제의 총애를 얻어 벼락출세를 했다.
건륭제 사망에 즈음해 새 황제(가경제)가 화신을 불경죄, 참월죄, 전권죄, 축재죄 등 26개 죄목에 따라 자살을 명했을 때 황실 내무부 등에 몰수된 그의 재산은 당대 민간 기록에 따르면 무려 8억 냥(일설에는 10억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는 많게는 청조 1년 치 예산의 20배라는 설명도 있다.
청조의 역사는 자칫 이른 성공이 부패만 키울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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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배자인 만주족이 피지배자인 한족의 문화에 동화된 이유는 뭘까.
3. 청나라가 멸망하게 된 다양한 이유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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