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hankyung.com/photo/202206/AA.30402524.1.jpg)
15세기만 해도 리투아니아는 신성로마제국보다 큰 유럽 최대 영토를 자랑했다. 그러다 18세기 말 러시아 제국에 점령당하면서 고난을 겪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어 사용을 금지하는 문화 말살 정책을 폈다. 하지만 40년간의 리투아니아어 금지령은 역설적으로 리투아니아어 보급을 확산했다. 각 가정과 비밀 교육 시설에서 리투아니아어와 역사를 가르치면서 이 기간에 비밀리에 출판된 리투아니아어 서적이 350만 부가 넘었다고 한다.
러시아의 압제 속에서도 민족혼을 지켜낸 리투아니아인들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잠시 자유를 누렸다가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에 따라 소련에 다시 합병됐다. 이후 유대인 20만 명 학살과 시베리아 강제 이주 등 40년 이상 소련 위성국가로서 수모를 겪어야 했다.
소련에서 독립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세계사적 사건이 있다. 독·소 불가침 조약 50주년인 1989년 8월 23일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라트비아 수도 리가,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을 잇는 675.5㎞의 길에 세 나라 국민 200만 명이 손을 맞잡고 인간 띠를 만든 ‘발트의 길(Baltic Way)’ 캠페인이다. 리투아니아가 중국과 맞짱을 뜨게 된 계기도 이 캠페인과 무관치 않다. 딱 30년 뒤인 2019년 8월 23일 중국의 ‘송환법’ 제정에 반대하는 홍콩 반중 시위대가 발트의 길을 모방해 45㎞의 인간 띠를 만들어 ‘홍콩의 길’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동병상련을 느낀 리투아니아인들이 폭발적인 지지 집회를 열었다. 그 뒤 중국과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해 급기야 단교와 대만 수교로까지 치달았다.
리투아니아인들이 강대국과의 관계 속에서 터득한 교훈은 “작은 굴욕을 참으면 더 큰 굴욕을 겪게 된다”는 것이었다. 중국을 ‘큰 봉우리’라고 한 대통령을 뒀던 우리에게는 남다르게 들리는 메시지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