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처럼 엉킨 하얀 실들이 방 하나를 가득 메운다. 그 사이로 흰 종이들이 둥둥 떠 있다. 그 가운데 길이 7m의 하얀 나무배와 흰 원피스가 시선을 압도한다.
뒤엉킨 실이 만들어낸 공간은 견고하고 아름답다. 엉키고, 얽히고, 끊어지고, 풀린 실들. ‘실’이라는 단어의 자리에 ‘삶’을 대입해봐도 좋다. 한 사람의 인생도 때론 엉키고, 누군가와 얽히고, 예기치 않게 끊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풀린다.
시오타 치하루(50)는 실 하나로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과 자신의 내면을 엮어내는 작가다. 붉은 거미줄 같은 설치 작품 ‘우리 사이에(Between Us)’로 화제를 모았던 그가 2년 만에 흰 실로 만든 거대한 설치 작품 ‘인메모리(In Memory)’를 들고 한국을 찾았다.
지난 15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만난 그는 “작가 한강의 소설 《흰》을 읽고 영감을 받아 작품을 완성했다”며 “흰색 자체가 (동양 문화권에서) 죽음을 상징하지만, 때론 죽음이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붉은 실이 아니라 흰 실을 택했다”고 말했다. 한강의 소설이 흰색의 사물을 연계해 죽음을 다루는 동시에 흰색이 죽음을 덮어내는 장면들과 교차하는 지점이다.
그에게 실이란 ‘보이지 않는 연결된 삶’을 말한다. 실을 대표적인 재료로 사용하지만 옷, 유리창, 놀이용 카드, 오래된 책, 누군가가 쓴 러브레터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보편적인 질문을 던진다. 독일 베를린에 약 40년간 살며 동네 벼룩시장 등에서 세상을 떠난 이들의 물건이 매대에 나올 때마다 사 모았다. ‘State of Being’(2022) 시리즈에 이 같은 오브제들을 엮어 놨다. 그는 “우리 몸은 유한하지만 의식은 영원하다”며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편지와 평생 즐기던 카드, 손때 묻은 책과 일기장 등에 그 기억들이 영원히 살아있다”고 했다.
이번 전시에는 드레스를 그린 판화와 드로잉 등 55점도 함께 전시됐다. 시오타의 작품에 옷과 창문은 실과 함께 자주 쓰이는 재료다. 외부와의 경계를 이야기하는 매체다. 옷은 나와 외부를 경계 짓는 제2의 피부로, 창문은 지리적 경계를 상징하는 도구로 해석된다.
작품엔 흰 배가 가장 압도적인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배는 인간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질문하는 매개”라며 “기억과 죽음, 인간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졌을 때, 우리는 기억의 바다에서 영원히 방황하는 존재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시오타는 한강의 소설이 자신의 예술세계와 비슷한 점이 많아 크게 감동했다고 했다. 그는 “소설에서 막 낳은 아이가 두 시간 만에 죽는 장면에서 엄마는 ‘죽지마, 죽지마라, 부탁할게’라고 말하는데 유산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며 “흰색에 대한 기억들이 이번 작품을 만든 계기”라고 했다.
그가 죽음과 삶, 존재와 부재에 대해 이토록 오랜 시간 통찰해온 이유는 뭘까. 그는 전시회 직전 암에 걸린 일을 떠올리며 “나에게 산다는 것은 곧 작품을 하는 것이고, 예술하지 않는 것은 이미 죽은 삶이나 다름없다”며 “죽음의 공포 앞에서 빠진 머리카락, 항암제, 빈 병 등이 모두 내 작품의 하나가 됐다”고 했다.
안소연 미술평론가는 “흰색이 자아내는 숭고와 공포는 시오타의 작업이 늘 그래왔듯 이중적인 긴장감을 동시에 발산한다”며 “그 한편에서는 팬데믹으로 붕괴한 일상의 시공간, 존재의 상실과 회복에 대한 사유를 돕는 암시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8월 21일까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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