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獨공습 '공포'를 지운 처칠의 한마디 "포기 안하면 승산있다"

입력 2022-07-22 18:02   수정 2022-07-22 23:37


“그리하여 대영제국과 영연방의 영광이 만대(萬代)로 이어질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요. ‘그때가 영국의 최전성기였다(This was their finest hour)’고.”

1940년 6월 18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사진)가 의회에 나와 이렇게 연설했을 때 영국은 오히려 ‘가장 어두운 시절(darkest hour)’에 가까웠다. 프랑스가 무너진 지 나흘, 덩케르크에서 철수한 지 2주가 지났을 때였다. 독일군의 영국 본토 공격은 시간문제였다. 책임 추궁에 내부 갈등과 의견 대립은 더 커졌다.

절망이 가득한 영국 국민에게 처칠은 연설을 통해 낙관을 불어넣었다. 독일군을 쉽게 물리칠 수 있다며 상황을 왜곡하거나 과장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어려운 상대지만 포기하지 않고 싸운다면 승산이 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공중에서든 지상에서든 그 친구들을 열렬히 맞이해줄 것”이라며 농담도 곁들였다. BBC방송을 통해 영국인의 60%가 이 연설을 들었다. 88%가 지지를 보냈다.

《블루스퀘어-세상을 외치다》는 이렇게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명연설을 담은 책이다. 어떤 연설이 좋은 연설인지 분석한다. 하지만 단순히 ‘연설 기술’에 관한 책이 아니다. 정치 책에 가깝다. 자유민주주의는 훌륭한 연설을 통해 발전하고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수석 연설문 작가로 일하기도 했던 저자는 “민주주의가 위기를 겪고 있는 시대에 위대한 연설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리기 위해 책을 집필했다”고 말한다.

연설이 ‘말만 번지르르하다’는 비난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연설을 ‘말로 잔재주를 부리는 짓거리’라고 지적했다. 이제 ‘연설이 필요 없는 시대’가 됐다는 말도 나온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짤막한 메시지로도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연설은 불가분의 관계다. 저자는 “연설과 민주주의는 쌍둥이로 태어났다”고 표현한다. 민주주의는 힘이나 권위에 의한 강요가 아닌, 말을 통한 설득으로 작동하는 까닭이다.

로마 시대 정치가이자 작가인 키케로는 아예 연설과 정치를 같은 것으로 봤다. 둘 다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논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하고, 이러한 주장을 명확하게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 표현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좋은 평가를 받은 정치인 중엔 명연설가가 많았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1987년 6월 12일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 앞에 서서 당시의 시대 정신을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평화를 원한다면, 소련과 동유럽의 변화를 원한다면, 그리고 자유화를 원한다면 여기 이 문으로 오십시오!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문을 여십시오!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장벽을 허물어버리십시오!”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국무부 등 주변에서 너무 도발적이라며 반대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레이건이 옳았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연설장 주변에 열광적인 반응이 일었다. 누구도 쉽게 하지 못했던 그 말을 레이건이 입으로 내뱉자 ‘진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사람들 사이에서 부풀어 올랐다.

1863년 11월 19일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도 그랬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구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말로 끝났다. 2분짜리 연설이었지만 여운은 길었다. 남북전쟁 후 새로운 미국을 여는 초석이 됐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는 1588년 영국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있던 스페인 함대와의 격전을 앞두고 “나는 하나님을 위해, 내 왕국을 위해, 그리고 내 백성을 위해 이 내 한 몸의 명예와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 있소”라며 여성 지도자라는 의구심을 한 번에 지워버렸다.

연설은 이렇게 고난의 상황에서, 위기의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분열된 국민을 하나로 모으고, 다 같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게 리더의 일이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가들은 오히려 분열을 조장한다. 공포심을 자극한다. 정반대로 숨어버리기도 한다.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한 주제를 직접 다루는 것을 꺼리고, 측근을 통해 ‘전언 정치’를 한다. 좋은 연설이 사라진 빈 공간을 채운 것은 단순히 나쁜 연설이 아니라 나쁜 민주주의였다.

책의 원제는 ‘저들이 저열하게 나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갑시다(when they go low we go high)’. 2016년 당시 미국 영부인 미셸 오바마가 한 연설에서 따왔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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