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론된 캐치프레이즈들이 성공했다면 또 모르겠다. 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은 함께 내걸었던 혁신성장을 짓누르고 말았다. 정부가 주도하는 소주성과 민간이 주도해야 하는 혁신성장은 처음부터 부조합 그 자체였다. 박 정부의 창조경제, 이 정부의 녹색성장, 노 정부의 혁신성장도 그렇다. 민간이 ‘창조적 파괴’의 주체가 될 때 가능한데도 정부가 관치로 주도하겠다고 설치면서 망친 것이다.
기술과 지식, 아이디어가 성장을 주도하는 혁신경제가 시대적 과제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수많은 다양한 개인과 기업이 혁신경제를 이끌어가는 것인데도, 환경조성자 역할을 해야 하는 정부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주인공이 되겠다고 나선다는 점이다. 그럴듯한 캐치프레이즈 하나로 안 좋은 경제가 좋은 경제로 확 돌아설 리도 없지만, 아무리 좋은 캐치프레이즈도 관치경제의 병폐가 그대로인 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워크숍에서 ‘한 방’으로 거론됐다는 ‘공정’과 상식’도 그렇다. 윤 정부는 국정과제에 혁신성장을 집어넣었다. 그것도 ‘역동적’ 혁신성장이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관료의 공정·상식, 기득권의 공정·상식이 혁신을 하겠다는 개인과 기업의 공정·상식과 같으냐는 것이다. 완전히 다르다. ‘현재’의 공정·상식이냐, ‘미래’의 공정·상식이냐의 차이다. 어떤 의미에서 혁신은 관료와 기득권이 가진 현재의 공정·상식을 깨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공정·상식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혁신성장의 진로는 완전히 달라진다.
어떤 캐치프레이즈도 ‘관치화’ ‘정치화’되는 순간 맛이 간다. 캐치프레이즈가 프레임으로 고착화하면, 사실에 근거해 현실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게 아니라 프레임에 근거해 현실을 꿰맞추고 해석하게 된다. 세상을 둘로 나누는 이분법, 엉터리 일반화와 고정관념, 잘못되면 특정 개인이나 집단 탓으로 돌리는 비난 본능, 단일한 원인과 단일한 해결책을 선호하는 단일 관점 등이 판을 치게 되는 것이다.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어떤 캐치프레이즈도 통할 리 없다. 불행히도 윤 정부 경제 컨트롤타워는 관치에 익숙한 구시대 관료들로 가득하다.
장·차관 워크숍 후에도 대통령실은 캐치프레이즈를 계속 검토해 나가겠다고 하는 모양이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이런 일로 시간을 허비할까 걱정돼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굳이 캐치프레이즈를 만들겠다면 초심으로 돌아가라. 윤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가장 많이 말했다는 ‘자유’와 인수위원회 때 경제단체장들을 불러 모아 강조했다는 ‘민간주도 경제’를 합치면 어떤가. ‘자유가 넘치는 민간주도 경제’라면 지난 60년간의 관치 모델과 결별하고 새로운 경제로 나아가자는 캐치프레이즈로 충분하지 않은가. 규제개혁을 필두로 기업·노동·교육·공공·금융·세제 등 시대가 요구하는 경제정책을 다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캐치프레이즈가 먹히려면 지금의 대통령실·정부·당으론 안 된다. 시대가 요구하는 대대적 인적 쇄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경제는 한 방으로 안 된다. 한 방은 ‘빅맨’이 경제를 움직일 때나 통하던 얘기다. 경제가 복잡해질수록 빅맨보다 시장경제의 우위성이 더욱 커지게 돼 있다. 정부는 복잡한 시장경제 현실 앞에서 먼저 겸손함을 갖출 필요가 있다. “겸손이란 본능에 의존해서는 사실을 올바르게 파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것이고, 자신이 아는 지식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 아울러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것이자,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을 때 기존 의견을 기꺼이 바꾸는 것이다.” 사실에 근거해 현실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태도와 관점을 의미한다는, 한스 로슬링이 쓴 《팩트풀니스(factfulness)》에 나오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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