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SMIC(中芯國際·중신궈지)가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조치를 뚫고 7나노(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공정 개발에 성공하면서 백악관이 발칵 뒤집혔다. 바이든 행정부는 모든 미국 반도체 제조장비 업체의 중국 수출 제한 기준을 기존 10나노에서 14나노로 대폭 강화하는 등 '중국 반도체 굴기' 억제를 본격화했다는 평가다.
7나노는 극자외선(EUV·Extreme ultraviolet) 노광 장비가 없으면 공정 진행이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의 제재로 EUV 노광 장비의 중국 본토 반입이 금지된 가운데 SMIC가 7나노 벽을 뚫으면서 어떻게 공정 개발이 가능했는지 다양한 추측이 나오는 상황이다.
우선 SMIC의 7나노 공정이 TSMC가 만든 제품과 설계가 유사하다는 분석이 있다. 글로벌 반도체 리서치 전문 업체 테크인사이츠가 SMIC의 7나노 공정 반도체를 분석한 결과 3300W(와트)의 전력 소비와 초당 105TH/s(테라해시) 전송 속도 등이 TSMC의 7나노 공정 제품과 동일했다. 이에 SMIC가 TSMC의 7나노 공정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TSMC는 2003년과 2009년 기술 유출을 이유로 SMIC를 두 차례 고소해 승소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SMIC의 7나노 공정이 TSMC의 설계와 유사한 점을 들어 기술 유출을 의심하고 있다. SMIC가 미국 몰래 EUV 장비를 몰래 확보했거나 SMIC로 대거 이직한 TSMC 간부급 임원들이 TSMC의 7나노 공정 설계를 그대로 도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14나노 공정은 첨단 반도체를 가르는 기준으로 꼽힌다. SMIC가 지난해 14나노 공정 제품 양산에 들어간 데 이어 7나노마저 성공하는 등 기술 격차가 좁혀지자 바이든 행정부가 수출 통제를 더욱 강화했다는 분석이다. 반도체 기술 국산화에 사활을 건 중국 정부는 미국의 제재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리어 14나노 이하 공정 설계 기업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 첨단 반도체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계적 반도체 제조장비업체 램리서치의 팀 아처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콘퍼런스콜(전화회의)에서 "정부의 수출 제한 조치가 확대됐다는 통보를 받았다"며 "14나노 공정보다 미세한 제조 기술을 적용한 반도체 장비는 중국에 수출하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이라고 알렸다. 미국의 또 다른 주요 반도체 장비업체인 KLA의 릭 월러스 CEO도 같은 내용의 수출 제한 조치를 정부로부터 통보받았다고 했다.
기존 10나노 대비 우위 기술에 대해서만 수출을 제한하던 미국 정부가 기준을 14나노로 변경했다는 것은 중국의 첨단 기술 발전을 저해하려는 노력이 더 강화됐다는 의미로 읽힌다. 중국이 첨단 반도체를 스스로 제조할 수 없으면 차세대 통신, 로봇, 인공지능 등 미래 먹거리인 첨단 산업의 발전이 더뎌질 수밖에 없다. 블룸버그는 "미국 정부가 중국의 경제적 야망을 억제하려는 시도를 가속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앞서 미국 정부는 네덜란드 ASML, 일본 니콘에도 중국행 장비 수출을 제한해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상무부는 성명을 통해 "중국에 대한 제한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고만 밝히고 구체적 조치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블룸버그는 이번 조치로 중국의 반도체 기업 상당수가 영향을 받을 것으로 전망했다.
반도체법은 지원금을 받는 기업을 대상으로 향후 10년 동안 중국이나 기타 우려 국가에서의 첨단 반도체 관련 투자를 금지한다고 못 박았다. 중국에 반도체 생산 라인을 구축한 기업이 미국 정부의 지원금을 받게 되면 앞으로 중국 내 팹 신축이나 증산은 어려워진다.
존 커비 미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지난달 29일 브리핑에서 미국이 추진하는 한국, 대만, 일본 등 '칩4' 동맹에 대한 한국의 참여와 관련해 "한국은 반도체 분야 역할과 관련해 스스로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칩4 동참 문제에 대한 직접 언급을 피하면서도 한국의 역할을 강조해 우회적으로 압박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강화에 중국에서 대규모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입장 밝히기를 꺼리며 극도로 신중을 기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금 이 시점에 중국에서 뭔가를 하려 시도만 해도 미국의 의심을 살 것이다. 지금은 몸을 사려야 할 때"라고 말했다.
강경주 한경닷컴 기자 quraso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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