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틸, 토드 헨리의 리더십과 창조성에 관한 책을 읽는 음악가.’
대만계 호주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33)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레이 첸은 ‘개성파’ 음악가다. 2009년 스무 살의 나이에 세계적 권위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전 세계를 무대로 왕성하게 연주 활동을 하면서도 유튜브와 SNS를 통해 팬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자신의 개성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21세기형 아티스트’로 꼽히는 그에게 창조성과 리더십에 관한 경제·경영 서적을 읽는 게 어떤 도움을 줄까. 그는 25일 서면으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경제·경영 등) 다른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은 현재의 나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된다”며 “무엇보다 음악 밖에서 자신만의 음악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열어준다”고 했다.
여기서 ‘현재의 나’는 “약 1년 전부터 ‘토닉(Tonic)’ 애플리케이션을 준비하며 CEO로서 새로운 업무를 접하게 된 나”를 포함한다. “그동안 미처 몰랐는데, ‘나 중심의 삶을 살았다’는 걸 깨닫게 됐죠. 비즈니스를 하면서 한 통의 메일이든 중요한 미팅이든 ‘내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라는 이유를 댈 수 없었고, 이전과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필요했어요. 이런 일련의 과정이 나에게 구조적 사고와 논리적 사고를 더욱 촉진했습니다. 예를 들어 ‘플레이 위드 레이(Play with Ray)’ 오디션의 준비 과정을 논의할 때 참가자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많은 이에게 결선을 진행하는 것이 효과적인지를 고민하게 됐죠.”
레이 첸은 “이런 구조적인 의사결정 과정이 앞으로 음악을 하는 데 분명히 도움을 주게 될 것”이라고 했다. 무슨 말일까. “작곡가들은 굉장히 구조적으로 생각해요.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떠올려 보세요. 협연자인 내가 바이올린 악보에만 집중해 그 음만 연주한다면 바로 연주에 실패하는 지름길입니다. 전체 음악을 잘 듣고 작곡가의 음악적 아이디어들을 구조적이고도 효과적으로 동료들과 나누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음악 안에서든 음악 밖에서든 잘 들어야 합니다.”
‘토닉’ 앱은 레이 첸이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겪은 고립된 경험에서 비롯된 프로젝트다. “1년에 100회 이상 청중 앞에서 곡을 연주하다가, 갑자기 단 한 번의 공연도 할 수 없었죠. 고립된 건 저 혼자만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모두가 모여서 함께 연습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포켓 컨서바토리’ 라는 마스터 클래스를 중심으로 하는 앱으로 시작했고, 참여자들이 직접 토론과 연주를 통해 살아있는 의견을 나누면 더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지금은 마스터클래스를 넘어 학생이든 전문 연주자든 서로 모여 격려하며 연습을 이어갈 수 있는 그런 커뮤니티를 만들고자 합니다.”
레이 첸은 코로나19 이후 첫 투어 공연을 진행 중이다. 그 일환으로 2019년 이후 3년 만에 한국 무대에 오른다. 피아니스트 선우예권과 오는 3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을 시작으로 9월 1일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 2일 대구 달서아트센터 청룡홀, 3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듀오 리사이틀을 연다. 두 사람은 미국 커티스음악원 입학 동기이자 동갑내기 친구다. 커티스음악원 재학 당시 여러 차례 호흡을 맞췄지만, 졸업 후 세계적 아티스트로 성장한 뒤 함께 무대에 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원래 2020년 8월 열려고 했다가 코로나19로 취소된 공연을 2년 만에 올린다. 프로그램은 슈만 1번, 브람스 2번, 베토벤 9번 소나타에서 그리그 2번과 풀랑크와 프랑크 소나타로 싹 바꿨다. “우리에게 잘 맞고 음악적으로 결이 맞으면서도 각자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곡을 고심해서 골랐습니다. 매우 아름다운 그리그 2번은 낭만과 비극을 포함한 강렬한 이미지들이 있는 곡입니다. 풀랑크의 소나타는 좀 더 어둡고 긴장감이 흐르는 곡입니다. 그리그 2번과 대조적인 조합이 될 것입니다. 프랑크 소나타는 선우예권과 커티스음악원 시절 함께 연주한 적이 있습니다. 4개의 악장이 마치 순회하는 인생처럼 느껴지는 곡이죠.”
레이 첸이 외향적이고 활달하다면, 선우예권은 내성적이고 침착하다. 선우예권이 스스로 인정하듯이 “거의 정반대의 성향”이다. 곡을 고를 때나 함께 연주하면서 서로 부딪히지는 않았을까. “예권이는 함께 음악을 만드는데 참으로 좋은 파트너입니다. 당연히 그도 음악적으로 강한 의견이 있지만 일단 상대의 의견을 경청해줍니다. 음악적으로 유연하고 인내심도 많아요. 리허설에서 제가 ‘여길 좀 더 빨리해볼까?’ 하면 예권은 ‘그럼 한번 해 볼까?’ 하면서 일단 한번 같이 연주해봐요. 그러면 그게 좋은지 아닌지는 너무나 명백해지죠. 결코 충돌하지 않아요. 커티스 시절부터 음악적 아이디어들을 서로 나누고 발전시켜온 좋은 시간과 경험이 있기 때문에 서로의 음악을 합쳐서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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