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7일(현지시간) 미국 중앙은행(Fed) 주최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열리는 국제심포지엄(잭슨홀 미팅)에서 마지막 세션 발표자로 나섰습니다. 잭슨홀 미팅에는 제롬 파월 Fed 의장 등 Fed 인사들과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와 경제전문가들이 모였습니다.
잭슨홀 미팅에서 세션 발표자로 나선 한은 총재는 이 총재가 처음입니다. 학자가 아닌 주요국 중앙은행 총재가 한 세션의 발표자로 나서는 것도 이례적입니다.
이 총재는 국제통화기금(IMF) 근무 시절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진 더글라스 렉스턴 박사와 공동으로 집필한 '비전통적 통화정책의 신흥국 및 소규모개방경제에 대한 교훈(Lessons From Unconventional Monetary Policy for Small Open Economies and Emerging Markets)'이란 제목의 논문을 바탕으로 발표에 나섰습니다.
논문은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선진국은 물론 신흥국 중앙은행이 펼친 양적완화(QE)와 비전통적 포워드 가이던스 등 비전통적 통화정책의 유효성과 한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 총재는 우선 코로나19 국면에서 각국 중앙은행이 국채와 회사채를 매입하는 등 양적완화를 실시한 것과 관련 "그간 금기시된 국채 직접 인수 등을 동원해 대규모의 확장적 통화정책 및 재정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통화가치 하락이나 자본 유출의 발생 없이 금융시장이 안정됐다"고 평가했습니다.
이 총재는 "그러나 이는 전 세계가 코로나19 위기라는 공통의 충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임에 유의해야 한다"며 "글로벌 유동성이 풍부한 가운데 선진국이 먼저 더 큰 규모로 금기를 깨고 있었던 덕분에 신흥국은 초확장 정책에도 불구하고 환율 상승과 같은 불이익을 피할 수 있었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러면서 "향후 신흥국이 홀로 저성장 및 저물가 위험에 직면해 유사한 비전통적 정책을 시행할 경우 같은 결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 총재는 '비전통적 포워드 가이던스'의 한계를 설명하며 Fed를 에둘러 비판해 눈길을 끌었는데요. 포워드 가이던스란 중앙은행이 현재 경제 상황에 대한 판단을 바탕으로 미래의 통화정책 방향을 예고하는 일종의 선제적 지침입니다.
이 총재는 이런 포워드 가이던스를 '전통적'과 '비전통적'으로 나눠 설명했습니다. 전통적 포워드 가이던스는 성장률, 물가, 실업률 등의 거시경제 전망치와 함께 중앙은행의 목표에 부합하는 금리 경로를 제시하는 걸 의미합니다.
반면 비전통적 포워드 가이던스는 거시경제 전망치에 대한 제시 없이 단순히 특정 시기나 목표치를 예고하는 걸 의미하는데요. 이 총재는 이런 비전통적 포워드 가이던스에 대해 "커뮤니케이션이 과도하게 단순한 경향이 있고, 그로 인해 경제주체들은 외부 환경이 급변할 때 정책이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과도한 단순화로 시장이 불확실성을 과소평가하게 되면 중앙은행은 출구전략을 구사하기 어려워진다"고도 했는데요. 이 총재는 그러면서 2013년 '긴축 발작(taper tantrum)'을 사례로 들었습니다.
긴축 발작은 당시 벤 버냉키 Fed 의장이 2013년 5월 "상황 개선이 예상대로 지속된다면 자산 매입 규모를 줄일 수 있다"고 통화 완화 기조에서 긴축 기조로의 전환을 시사하자 전 세계 금융시장이 혼란을 겪은 일을 말합니다. 버냉키 의장은 불과 2012년만 해도 "2015년 중반 넘어서도 제로금리 유지할 수 있다", "실업률이 6.5% 달성할 때까지 제로금리를 유지하겠다"와 같은 비전통적 포워드 가이던스를 제시했는데요. 그런 그가 이듬해 비교적 조심스럽게 통화 완화에서 긴축 기조로의 전환을 시사하자 주식 시장이 폭락하고 신흥국 환율이 치솟는 등 '발작'이 나타났습니다.
이 총재는 현재 파월 의장 체제의 Fed를 겨냥한 평가도 내놨습니다. 이 총재는 "중앙은행이 기존의 포워드 가이던스를 고수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신뢰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할 가능성이 커진다"며 "최근 저인플레이션에서 고인플레이션의 전환 과정에서 중앙은행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이러한 경직성으로 인해 정책 전환을 미뤄온 것에 일부 기인했을 수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Fed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지난해까지 제로금리 유지를 줄곧 시사해 온 Fed는 올해 뒤늦게 금리 인상에 나섰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 총재는 이런 비전통적 포워드 가이던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복수의 시나리오를 상정하는 전통적 포워드 가이던스, 즉 시나리오에 기반한 전통적 포워드 가이던스를 생각해 볼 수 있다"며 "지난해 여름 전 세계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압력이 지속적인지, 아니면 단기에 그칠지에 대해 불확실성이 매우 높았던 상황에서 두 가지의 시나리오(지속적 vs 일시적)를 상정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지난해 "인플레이션은 일시적"이라고 단언했던 파월 Fed 의장을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됐습니다.
이 총재는 포워드 가이던스와 관련 한은의 사례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 총재는 "지난 7월 한은은 처음으로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상했다"며 "인상 시점에는 시장에서 0.5%포인트의 인상 폭을 예상했기 때문에 향후 통화정책 경로에 대한 포워드 가이던스가 더욱 중요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은은 일종의 절충안을 취했다"며 "공식 의결문에는 '금리인상 기조를 이어 나갈 필요가 있다'와 같은 정성적 문구만 포함하기로 한 반면, 이후 기자간담회에서 '국내 물가 흐름이 현재 우리가 전망하고 있는 경로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금리를 당분간 0.25%포인트씩 점진적으로 인상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다'와 같은 보다 구체적인 포워드 가이던스를 제시했다"고 전했습니다.
이 총재는 "이런 접근은 시장이 원하는 최소한의 포워드 가이던스를 제공하면서도 향후 통화정책 운용상의 신축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총재는 "신흥국들은 앞으로 시나리오 기반의 전통적 포워드 가이던스와 같은 보다 정교한 정책체계를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며 "신흥국이 각자 여건과 필요에 최적화된 비전통적 정책 수단을 갖추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의 분석 역량, 경험의 축적, 폭넓은 연구가 필요하며 지금과 같은 때야말로 이를 위해 투자할 시기"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총재가 이날 잭슨홀 미팅에서 발표와 함께 공개한 논문은 17페이지 분량으로, 지난 4월 말 한은 총재로 취임한 뒤 완성됐다고 합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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