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투기 세력의 공격은 외환당국이 전가의 보도처럼 ‘펀더멘털론’을 꺼낼 때 시작된다. 강한 부정을 위기를 인정하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수치가 이를 말해준다. 지난달까지 무역수지는 6개월 연속 적자를 기록했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5월 이후 25년 만에 처음이다. 이달 들어 10일까지 무역적자는 38억달러를 넘었다. 연간 누적 적자는 300억달러를 돌파했다.
표면적 이유는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 수출의 약세다. 반도체는 글로벌 경기의 바로미터다. 경기가 침체로 돌아서면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무역수지가 곧바로 충격을 받는 ‘스몰 오픈 이코노미(Small open economy·소규모 개방경제)’의 비애다. 환율의 경기 자율조정 기능이 먹히지 않은 지도 오래됐다. 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 수출이 늘고, 국내 경제가 좋아지는 메커니즘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이쯤에서 드는 질문은 ‘금융의 삼성전자’는 왜 없는가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줄곧 제기된 화두이자 역대 정부가 받은 숙제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얼마 전 다시 찾은 뉴욕 월가의 분위기에서 알 수 있었다. 뉴욕 맨해튼은 허드슨 야드가 재개발되고, 맨해튼의 스카이라인도 달라졌지만,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금융회사들만 과거 모습 그대로였다. 법인과 지점의 크기도, 직원들의 숫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 기업에 자금을 대출하면서 여전히 ‘안전지대’에 머물러 있는 업무 영역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LG전자 SK가 앞다퉈 미국에 조 단위 투자를 퍼부으며 글로벌 기업으로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지만 한국 금융회사의 초라한 위상은 30년 전 그대로였다.
때마침 국내 금융지주사 최고경영자(CEO)들의 미국행이 러시를 이루고 있었다. 글로벌 거래처 인사를 만나는 목적도 있지만 주된 이유는 워싱턴DC에서 열리는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에 참석하는 경제부총리의 들러리를 서기 위해서다. 과거 낙하산으로 내려온 모피아 출신 은행장들이 경제수장의 ‘워싱턴 행차’에 따라나서 박수를 치는 후진적 관행이 수십 년째 유지되고 있다. IMF 연차총회에 주요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참석하지만 민간 금융회사 CEO를 거느리고 참석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한 금융사 최고위층은 사석에서 “말도 안 되는 폐습이지만 누가 선뜻 나서서 없애자고 할 수 있겠느냐”고 분위기를 전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주재한 거시금융상황점검회의에는 4대 그룹 최고재무책임자(CFO)까지 참석했다. 언제까지 외환시장의 방파제 역할을 제조업에만 맡겨둘 것인가. 금융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정부 뒤꽁무니를 쫓으면서 ‘우물 안 개구리’에 안주하려는 습성부터 버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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