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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말들은 없었다. 한국 문학사의 굵직한 획을 그었지만 거장들은 소소한 이야기와 가벼운 농담으로 가을밤 술잔을 채웠다. 소설가 김주영 선생(83)과 이문열 선생(74)은 40년간의 인연을 스스럼없이 문학과 인생 그리고 우정으로 풀어냈다.
김 선생이 “어이” 하고 막걸리잔을 내밀면 이 선생이 잔을 맞부딪히며 말했다. “내가 형님한테는 꼼짝을 못 한다니까. 문단의 큰 선배인데다 우리 큰형 친구이기도 해서 아주 꽉 잡혔지.”(웃음) 경북 청송에서 나고 자란 김 선생과 경북 영양 출신인 이 선생은 경북 출신 동료문인으로 수십 년간 인연을 이어왔다. 술이 몇 순배 오간 뒤 김 선생이 문득 말했다. “이문열이가 말은 잘 못 해도, 글은 정확하게 쓰는 작가야.”
문학인을 꿈꾸는 단국대 문예창작과 대학원생 20여 명은 이렇게 문학계의 대선배와 마주하게 됐다. 학과장인 안도현 시인과 소설가 해이수 교수가 함께했다. 시인이자 문학여행 기획자인 이종주 음식시학 대표, 이희범 전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이사장으로 있는 경북문화재단이 힘을 보태 마련한 자리였다.
첫 번째 합평의 기억은 강렬했다. 계속 글을 쓰게 한 동력이 됐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 선생은 첫 합평을 만해 한용운의 시를 인용해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 표현했다. “내가 글을 읽고 나니 다들 조용해요. ‘나를 무시하나?’ 싶었는데 곧 말없이 박수를 치더라고요.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 이런 기분이구나’ 하는 걸 그날 처음으로 경험했죠.”
그는 1979년 <새하곡>으로 등단한 이후 <사람의 아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굵직한 작품을 통해 시대를 직시하며 문단과 대중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등단 전까지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라고 했다. 방황으로 산 세월이 10년을 채워갔다. 지금의 이 자리까지 어떻게 오게 됐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는 뭘 말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이 선생은 강연을 마무리하며 말했다. “창작의 길을 어떻게 걸어왔는지 나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계속 쓰다 보니 어느 날 작가가 돼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세관원의 이야기를 예시로 들기도 했다. 세관원은 매일 수상한 남자를 본다. 이 남자는 모래가 가득 든 가방을 메고 자전거로 국경을 오간다. 모래가 아닌 마약일까 봐 과학수사도 벌이지만 물증을 찾지 못한다. 결국은 남자가 고백한다. “사실은 내가 자전거를 밀수하고 있다.” 김 선생은 “상식에 매몰된 사람의 허를 찌르는 이야기”라며 “이런 이야기를 찾아내는 게 예술가들이 할 일”이라고 했다.
김 선생은 “글 쓰는 사람들과 늘 붙어 다녀야 한다”며 “그래야 나도 결국 글을 쓰게 된다”고도 했다. 언제나 수첩을 들고 다니는 것 역시 그의 글쓰기 ‘비법’이다. 보부상의 이야기를 다룬 10권짜리 대하소설 <객주>를 쓸 때도 마찬가지였다. 객주문학관에 전시된 그의 수첩에는 돋보기를 들이대야 겨우 보이는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하다. 전국 장터를 돌며 소설을 쓴 그는 수첩 부피를 줄이느라 작은 글씨로 메모했다. “아무리 좋은 글감이라도 적지 않으면 결국은 사라집니다.” 김 선생은 이날 문학관 내부 자신의 집필실 ‘여송헌’도 특별히 공개했다.
예비 문인들은 이번 문학기행의 경험을 각자 글로 써 작품집을 낼 예정이다. 아동문학 석·박사 통합과정생 최송희 씨(28)는 “김주영, 이문열 선생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며 제 문학세계를 더욱 탄탄히 꾸려나가는 소중한 시간이었다”며 “읽고 쓰는 것뿐만 아니라, 보고 듣고 걷고 이야기 나누는 모든 순간이 문학이 될 수 있음을 다시금 실감했다”고 말했다.
영양·청송=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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