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양평군 강하면 남한강 강자락에 들어선 복합문화공간 이함캠퍼스의 전시2관. 짙은 어둠과 함께 습한 공기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빗소리와 천둥소리가 얼마나 들렸을까. 어느새 나타난 등대에서 한 줄기 빛이 비친다. 빛은 점차 강해지고, 안개 속에 숨어 있던 등대와 함께 공간의 전모가 모습을 드러낸다. 전시2관의 전체 관람시간은 총 8분40초. 관람객들은 저마다 깊은 사색에서 돌아온 모습이다.
이함캠퍼스에서 열리는 ‘사일로랩 앰비언스’ 전시는 느린 호흡의 작품으로만 채워져 있다. 한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려면 10분은 족히 걸린다. 7개 작품 모두 마찬가지다. 관객들은 때로는 짙은 안개 속의 등대를, 때로는 잔잔한 수조 위에 일렁이는 파동을 응시하며 ‘멍을 때린다’. 전시를 기획한 사일로랩의 이영호 대표(38·사진)는 “작가나 작품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도 직관적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전시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사일로랩은 예술가 19명으로 이뤄진 미디어아트 그룹이다. 2013년 결성됐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이 대표와 미디어 공학을 공부한 박근호 대표가 친구들을 삼삼오오 불러 모아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사일로랩이란 이름은 ‘격납고’라는 뜻의 ‘silo’에서 따왔다. 작업실에 항상 미디어아트에 필요한 전선과 장비들이 무기처럼 널려 있어서다. 아직 10년도 되지 않았지만 업계의 ‘유명인사’다. 나이키 포르쉐 벤츠 현대자동차 롯데월드타워 넷플릭스 젠틀몬스터 등 유명 기업과 협업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사일로랩이 이제는 예술과 상업의 경계를 무너뜨린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2014년 작품 ‘묘화’가 계기가 됐다. 2014년 안경 브랜드 젠틀몬스터가 예술가들에게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쳐보라’고 내준 홍대 플래그십 스토어 1층 공간에 사일로랩은 나무 프레임 안에 백열전구를 여러 개 설치했다.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전구가 꺼졌다가 켜지는 인터랙티브 작품이었다.
백열전구보다 LED(발광다이오드)가 더 익숙한 세대에게 ‘아날로그 감성’을 불러일으킨 이 작품은 SNS에서 입소문을 타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많은 기업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쏟아졌고, 사일로랩은 아모레퍼시픽 설화수 광고에 묘화를 활용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예술과 상업 프로젝트가 선순환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새로 제작한 작품도 있다. 12t의 물로 가득 차 있는 수조 위에 메아리처럼 퍼지는 물결을 구현한 ‘파동’,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하늘의 색깔을 보여준 ‘채운’, 어둠 속에서 빛으로 리듬을 만들어내는 ‘칠흑’ 등이다. 사일로랩은 이런 작품들로 이함캠퍼스라는 ‘텅 빈’ 공간을 올해 초부터 반년간 채워나가 지난 7월 전시의 문을 열었다.
작품 설치뿐 아니라 전시장 내부 인테리어까지 모두 사일로랩의 몫이었다. 제주 바닷가 등대에서 영감을 받은 ‘해무’에선 관람객이 실제 바다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습하고 축축한 냄새를 전시장에 가득 차게 했고, ‘파동’에선 관람객이 사색에 잠길 수 있도록 명상적인 음악과 향기를 연출했다. 전시를 통해 오감(五感)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 대표는 “단순히 작품을 설치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그에 걸맞은 공간을 연출하는 것까지가 모두 작품의 한 과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은 곧 불필요한 것들을 최소화하는 과정이었다. 작품 설명 등 텍스트뿐 아니라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작품이 움직이는 화려한 인터랙티브 기술도 덜어냈다. 그저 바라보고, 듣고, 느끼며 그 순간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작품을 감상하다가 펑펑 우는 사람도 적지 않다고 했다. “이곳에 정답은 없어요. 각자의 시선대로 작품을 해석하고, 그로부터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면 전 만족해요.”
이제 사일로랩은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 사일로랩의 작품을 즐길 수 있는 갤러리를 만들 계획이다. 이 대표는 “아트, 트렌드, 교육 등 세 가지 카테고리로 나눠 사일로랩만의 스타일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선보일 것”이라고 했다. 이함캠퍼스 전시는 내년 6월 30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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