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가 밝혀질 뻔했던 '얼굴 없는 화가' 뱅크시가 간신히 '얼굴 공개'를 면했다. 뱅크시의 작품을 두고 일어난 상표권 분쟁에서 유럽연합(EU) 항소위원회가 뱅크시의 손을 들어주면서다.
예술 전문 매체 아트뉴스페이퍼는 EU 항소위원회가 최근 뱅크시의 '트레이드마크'인 침팬지 이미지의 상표권 취소 신청을 기각했다고 16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지난해 5월 EU 지적재산청(EUIPO)이 뱅크시의 회사 '페스트 컨트롤'이 출원한 유인원 이미지 상표권이 적합하지 않다고 한 판단을 뒤집은 것이다.
이 상표권 분쟁은 2019년 연하장 업체인 '풀 칼라 블랙'이 페스트 컨트롤에 상표권 취소를 청구하면서 시작됐다. 이 업체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뱅크시 작품의 상표권을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뱅크시의 이미지가 상표권을 취득할 만큼 독특하지 않고, '악의적(in bad faith)'으로 등록돼있다는 것이다.
상표권의 취지는 소비자가 상품의 출처를 알 수 있도록 한 것인데, 뱅크시가 타인의 상표 등록이나 사용을 아예 막기 위해 악의적으로 상표를 등록했다는 게 업체의 주장이다. 풀 칼라 블랙은 뱅크시의 작품 이미지 일부를 자사 연하장에 사용하기도 했다.
EUIPO는 이 업체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앞서 EUIPO는 '뱅크시가 익명의 인물이라 상표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레이더 쥐(Rader Rat)', '우산을 든 소녀(Girl with Umbrella)' 등의 상표권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상표권을 지키려면 뱅크시가 자신의 신원을 밝혀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EU 항소위원회는 다시 뱅크시의 손을 들어줬다. 항소위원회는 페스트 컨트롤이 상표권을 출원한 것이 악의적인 행동이라는 풀 칼라 블랙의 주장이 충분히 증명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미술 전문 매체들은 이번 결정으로 뱅크시가 익명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게 가장 큰 수혜라고 보도했다. 아트뉴스페이퍼는 상표권 전문 변호사인 리 커티스를 인용해 "이번 결정은 뱅크시에게 중요한 승리"라며 "그의 정체를 계속 숨길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했다.
1990년부터 길거리나 벽에 그림을 그리며 활동을 시작한 영국 예술가 뱅크시는 30년 넘게 철저히 신분을 감춰왔다. 최근에는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물구나무를 선 채 균형을 잡고 있는 체조선수 벽화 등을 남기기도 했다.
뱅크시의 그림은 주요 경매에서 수백만달러에 거래된다. 이번 상표권 논쟁의 대상이었던 고릴라 모습의 벽화 '지금 웃어둬라, 하지만 언젠간 우리가 지배할 것이다(Laugh Now But One Day We'll Be In Charge)'는 지난 5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210만달러(약 28억원)에 팔리기도 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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