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성범죄에 '성적 수치심' 대신 '불쾌감'·'모욕감' 쓰자는 국회

입력 2022-12-05 10:52   수정 2022-12-05 11:08


국회가 성범죄의 구성요건인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를 성적 ‘불쾌감’이나 ‘모욕감’ 등으로 바꾸는 논의에 착수했다. 그동안 여성계는 “수치심은 정조 관념에 따라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며 용어 변경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법무부와 대법원 등 관계기관이 “수치심으로 이미 판례가 축적됐고, 처벌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며 신중론을 제기했다.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의원들 사이에도 의견이 갈려 결론을 내기 쉽진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고민정 "수치심 대신 불쾌감 쓰자"
5일 정치권에 따르면 법사위 법안심사1소위원회는 지난달 28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상 성폭력 범죄 판단 기준을 바꾸는 방안을 논의했다.

앞서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20년 8월 음란행위나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허위영상물 등 반포, 촬영물을 이용한 협박·강요 등 성범죄 구성요건인 성적 수치심을 불쾌감으로 바꾸는 내용의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고 의원은 개정안에서 “‘수치’는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 또는 그런 일’을 뜻한다”며 “이는 행위자의 잘못된 행위를 전제하고 있음에도 현행법에서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느껴야 하는 감정으로 사용돼 성범죄 피해자에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며 취지를 설명했다.

같은 당 권인숙 의원도 직장 내 성희롱 구성요건을 수치심에서 불쾌감으로 바꾸는 내용의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2021년 6월 발의했다. 올해 4월엔 성폭력처벌법상 수치심을 ‘사람의 신체를 성적 대상으로 하는’으로 바꾸는 법안을 발의했다.

법사위 법안소위가 이번에 성범죄 판단 기준인 수치심을 다른 용어로 변경하는 방안을 논의한 것은 고 의원이 처음 법안을 발의한 지 2년 3개월 만의 일이다.
법무부·대법원 "처벌 범위 확장, 혼란 우려"
이날 소위 논의에 앞서 법무부와 대법원 등 관계기관은 법 개정에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노공 법무부 차관은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를 (대체해) 성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고자 하는 입법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지금까지 성적 수치심에 관련된 판례가 축적됐고, 또 불쾌감이나 ‘성적 대상으로 하는’ 등은 의미가 불명확하고 처벌 범위가 지나치게 확장될 수 있다”고 했다.


김형두 법원행정처 차장은 “(용어를 바꾸면)해석론을 다시 정립해야 해 혼란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며 “다른 법령에도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를 쓰는 게 굉장히 많아서 그런 경우하고 뭐가 다른 거냐 이렇게 또 해석이 갈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현재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판례는 성적 수치심의 개념에 대해 “단순한 부끄러움이나 불쾌감을 넘어 인격적 존재로서 수치심이나 모욕감”을 요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자 권인숙 의원은 법 개정에 부정적인 법무부와 대법원을 강하게 비판했다. 권 의원은 “이렇게 법무부와 법원이 동의를 안하시느냐”며 “전혀 대안도 없이 이걸 그냥 유지하자라고 하는 것에 너무 성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힐난했다.


권 의원은 “(수치심은) 여성이 강간당했을 때 느껴야 되는 책임이라든가 이런 부분들이 굉장히 많이 담겨있다”며 “이것을 바꾸자는 것은 여성계와 성폭력 관계자들 그리고 피해자들의 숙제 같은, 숙원 같은 부분이었다”고 강조했다.

이탄희 민주당 의원도 “수치심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이라며 “피해자 욕구를 억누르는 문화적인 오염이 된 단어가 사실 맞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법원 양형위원회도 지난 7월에 양형인자의 수치심을 불쾌감으로 다 바꿨다”며 “하나의 제안으로서 모욕감 이런 건 혹시 어떤가”라고 제안했다.

이 의원은 “인격적 존재로서의 수치심 이라면 수치심이라는 단어가 또 나오니까 그거 말고 모욕감이라고 하는 것을 대안으로 혹시 써 보시면 어떤가”라고 재차 법무부와 대법원에 물었다.

그러자 같은 당 김남국 의원은 “현재 대법원 판례는 성적 수치심에 대한 해석을 모욕감 뿐 아니라 다른 감정들가지 포함하고 있다”며 “모욕감으로 해 버리면 오히려 처벌법이 구성요건에 있어서 처벌 범위를 더 줄여버리는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지금 (대법원은) 수치심이라는 단어를 수치심이나 모욕감으로 해석하고 있다”며 “그 수치심을 모욕감으로 바꿔도 법리적으로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후 권 의원과 이 의원을 중심으로 논의가 용어 변경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자 김 의원은 “일단 더 신중하게 검토를 하지요”라고 했다. 권 의원은 “신중한 검토가 아니라 검토”라며 “신중한 검토는 안 하겠다는 얘기니까”라고 맞받았다.
권인숙-김남국, '신중한 검토' 놓고 논쟁
논의가 과열될 조짐을 보이자 소위원장인 기동민 민주당 의원은 “2월 달에 한 번 더 토론하는 걸로 하겠다”고 중재에 나섰다.

김형두 차장은 “다른 법령에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 것들이 굉장히 많아서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도 좀 논의를 하셨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정점식 국민의힘 의원은 “조금 전 차장님 말씀에도 일리가 있다”며 “다음번 검토할 때는 차장님이 말씀하신 소위 여타 법률서 성적 수치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례 등도 함께 취합을 해서 같이 논의를 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김 의원은 신중론을 재차 피력했다. 그는 “대법원에서 판례를 바꿀 때도 상당히 많은 수의 판례가 축적되고 연구가 된 다음에 판례가 변경되는 것을 고려할 때 여기에 대한 접근을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어 “수치심을 불쾌감으로 바꾼다고 했을 때 수범자인 국민들이 어떤 것은 죄가 되고 (어떤 것은) 죄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있어서 사회적 공감대가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법안소위는 소위원장인 기 의원 중재로 내년 2월에 다시 논의하기로 보류 결정을 내렸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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