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밈’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꼰대’를 상징하는 문장으로 종종 쓰이고 있는 말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꼰대들의 어법을 비튼 말이다. 물론 이런 식의 ‘꼰대 화법’이 최근 몇 년 사이에만 존재하지는 않았을 터다. 20년 전에도, 50년 전에도 심지어 수백 년 전에도 분명 나이 지긋한 조직의 리더들, 관리자들은 이 같은 말을 꺼내며 과거를 회상하고, 자신의 경험과 깨달음을 전수하려 했을 거다. 꼭 나쁜 의도로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많은 경우 후배들에게, 청년들에게 도움도 됐을 것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시작된다. 왜 이 수십 년, 아니 어쩌면 수백 년 된 화법이 유독 지난 4~5년 사이에 조롱의 대상이 된 것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스마트폰을 항상 들고 다니고 들여다보며, 폰을 뇌의 연장이자 보조기억장치, 때로는 주기억장치로까지 활용하고 있는 ‘포노사피엔스’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내가 자네 연차였을 때에는 세상이 어땠고, 나는 어떤 성과를 냈다’고 말하는 순간 지금의 포노사피엔스들은 곧바로 검색에 돌입한다. 정확하게 그때 내가 속한 이 조직이 어떤 상황이었고 그때 해당 연차의 직원들은, 심지어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을 했는지도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다.
20년 전 까마득한 과거를 회상한다고 해봤자 현시점에서는 2002년이다. 그때는 이미 초고속 인터넷이 전국에 깔린 이후이고, 포털 사이트의 카페와 온갖 인터넷 커뮤니티 및 게시판이 활성화된 시기였으며 모든 뉴스가 인터넷으로 서비스되기 시작한 이후였다. 구글링하면, 포털에서 뉴스 검색을 하면 생각보다 많은 정보와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나의 20년 전에 대한 기억보다 훨씬 정확한 정보가 쉽게 나타나는 상황에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붙는 ‘과거 미화’까지 곁들여진 자기중심적 기억에 신뢰가 갈 리 없다. 필자가 언론에 몸담고 있던 시절에도 거의 25년 전의 자신을 회상하며 ‘나는 특종기사가 아니면 죽는 줄 알았다’고 후배들을 다그치던 선배 기자(데스크)의 말을 듣고 젊은 기자들이 ‘옛날 신문보기’를 검색해 사실은 그가 상당히 시시한 기사만 썼다는 사실을 바로 밝혀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직의 리더, 관리자들, 선배들은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말인가? 내가 경험을 쌓으면서 깨달은 많은 지혜와 통찰은 전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한 조직에 오래 있었든, 여러 조직을 경험했든 지금까지 살아남아 리더의 위치에 있다면 그 사람은 나름의 체계적 지식, 글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암묵지, 그리고 지혜와 통찰을 갖고 있을 확률이 높다. 모든 기록이 남아 있고 쉽게 모두가 그 기록과 정보, 그리고 지식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는 오히려 다른 무엇보다 경험과 사유를 통해 깨달은 지혜를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
방법도 간단하다. 먼저 듣는 것이다. 조직의 젊은 직원이, 아직 경험이 부족한 구성원과 동료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제안하고 말하면 일단 잘 적으면서 듣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제안자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 놓치고 있는 부분, 혹은 살짝만 다르게 생각하면 더 훌륭한 제안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제안에 대한 감사와 칭찬과 함께 알려주고 조언해주는 것이다. 그게 바로 쉽게 검색해 접근할 수 없는, 인터넷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통찰’이다. 자신의 제안을, 혹은 비판적인 문제 제기를 차분히 다 들어준 뒤에 깨달음을 주는 한마디를 주는 사람에게 그 누구도 ‘꼰대’라고 하지 않는다.
<z세대는>고승연 < Z세대는 그런 게 아니고 > 저자,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z세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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