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ML의 극자외선(EUV·Extreme Ultraviolet) 노광 장비를 한 대라도 더 유치하기 위해 삼성전자, TSMC, 인텔 등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들의 '물밑 경쟁'이 뜨겁다. ASML은 7나노미터(㎚·1나노는 10억 분의 1m) 이하 미세 공정에 필수인 EUV 노광 장비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는 업체여서다. 그런데 최근 EUV 장비의 수율(양품 비율)을 대폭 끌어올릴 것으로 기대되는 소재가 국내 중소기업에 의해 개발돼 글로벌 반도체 지형에 변곡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핀을 원료로 5나노 이하 EUV 펠리클(Pellicle) 제조 기술을 확보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개발사 그래핀랩이 주인공이다.
지난 5일 권용덕 그래핀랩 대표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실리콘을 재료로 만들던 펠리클을 그래핀 소재로 대체하게 됐다"며 "그래핀으로 만든 펠리클은 ASML 장비를 사용하는 반도체 대기업들에게 수율을 끌어올려줄 부스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입을 열었다.
펠리클은 대기 중 분자나 오염으로부터 포토마스크 표면을 보호하는 나노 단위의 박막이다. 5나노 이하 공정에 필수로 사용되며 주기적인 교체가 필요한 소모품이다. 펠리클은 대부분 실리콘 소재로 제작되고 있는 가운데 그래핀랩이 그래핀을 소재로 한 펠리클 양산을 눈앞에 두고 있다.
삼성전자와 TSMC가 사용하는 EUV 장비는 광원이 거울에 반사돼 웨이퍼에 패턴을 형성한다. 반사 과정에서 광원이 펠리클을 통과하게 된다. 실리콘 펠리클은 빛이 투과하는 과정에서 광원 손실이 크고 고온에 노출된다는 약점이 있다. EUV 광원은 파장이 13.5나노에 불과하기 때문에 모든 물질에 쉽게 흡수된다. 따라서 펠리클을 얇게 구현하고 투과율을 높이는 기술이 필요하다. 이때 효과적인 소재가 그래핀이라는 게 권 대표의 설명이다.
펠리클 소재가 중요한 이유는 노광 공정에서 발생하는 8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견뎌야해서다. 고온에 잘 견딜수록 수율이 높아진다. 실리콘은 고온에서 딱딱하게 굳는 특성 때문에 늘 파손의 우려가 있다. 또 다른 펠리클 재료인 탄소나노튜브(CNT)는 공정 중 수소와 만날 경우 화학 반응에 의한 손실이 일어나기도 한다. 실리콘과 CNT 소재 모두 수율 저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핀랩은 투과도와 내열성이 높은 그래핀이 펠리클 소재로 가장 적합하다고 봤다. 흑연을 원료로 한 그래핀은 두께가 0.2나노에 불과해 눈으로 볼 수 없을만큼 얇고 투명한 데다 신축성도 우수하다. 구리보다 100배 이상 전기가 잘 통하고 실리콘보다 100배 이상 전자 이동성이 빠른 것은 물론 강도는 강철의 200배, 열전도성은 다이아몬드보다 2배 이상 우수하기 때문에 '꿈의 신소재'로 불린다.
권 대표는 "그래핀 펠리클 양산에 최종 성공하면 반도체 대기업들이 확보전에 뛰어들 가능성이 높다"며 "안정적인 수율 확보는 파운드리의 핵심 경쟁력이기 때문에 그래핀 펠리클이 초미세 공정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파운드리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는 삼성전자와 TSMC, 인텔이 그래핀랩의 잠재적 고객"이라며 "그래핀을 적용한 EUV 펠리클 양산 사례는 전 세계에서 전무할 뿐만 아니라 생산 현장에서 만족할 만한 사양의 펠리클을 개발한 기업도 드물다"고 자신했다.
그래핀랩은 지난 9월 그래핀 층 두께 조절 기술 개발을 마치고 외부 기관에서 진행한 EUV 펠리클 투과율 검사에서 89%를 웃도는 투과율을 보였다. 최근 특허 등록한 '오존가스를 이용한 펠리클 소재용 그래핀 박막의 제조방법'으로 그래핀 두께 제어 기술도 확보해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권 대표는 "글로벌 펠리클 시장은 2024년 약 1조원 규모로 형성될 것"이라며 "일본의 수출 규제로 인한 소재 수급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등 반도체 주권을 지키기 위해 필수 소재의 국산화에도 앞장서겠다"고 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