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호의 국제경제 읽기] 미국·EU가 시작한 '기후 무역전쟁'

입력 2022-12-21 17:36   수정 2022-12-22 00:05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치적으로 내세우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으로 인해 한국산 전기자동차가 미국 시장에서 차별받게 되자 그간 우리 정부와 업계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미 재무부는 지난 19일 IRA의 ‘핵심 광물 및 배터리 부품 조건’ 세부 지침 발표를 내년 3월로 연기했다. 냉정히 말해 실낱같은 희망의 시간이 좀 더 주어졌을 뿐 우리의 요구가 구체적으로 관철된 증거는 아직 없다. 또 미국 상·하원에 발의된 전기차 세액공제 3년 유예를 핵심으로 하는 IRA 개정안도 집권당인 민주당 내 합의가 어려운 것은 물론, 원천적으로 기후위기에 대한 입장이 달라 IRA 폐지를 주장하는 공화당이 하원을 장악한 터라 불가능에 가깝다.

설상가상으로 유럽연합(EU)은 IRA에 대해 “공정 경쟁을 왜곡한다”고 비판하며 내년부터 철강 알루미늄 등 6개 분야를 시작으로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도입해 수입 제품의 탄소 배출량이 EU 기준을 초과하면 사실상 추가 관세를 부과한다. 철강 부문 타격에 직면한 한국은 이젠 탄소 배출량 산정법을 놓고 EU와 또 다른 싸움을 벌여야 한다. 기후위기를 명목으로 새 무역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시장경제의 리더격인 미국과 EU의 최근 보호무역조치 단행 추이를 보면 그 형세가 아찔할 정도로 1930년대와 닮아가고 있다. 대공황은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에 뉴욕 월가의 주가 폭락으로 시작됐지만 이를 세계 대공황으로 끌고 간 장본인은 1930년 제정된 미국의 스무트-홀리관세법이다. 여기에 1840년대부터 자유무역을 주창하던 영국이 ‘대영제국 우대제도’로 맞섬으로써 세계 무역량은 그후 2년 사이 3분의 1, 미국의 무역량은 5분의 1로 줄었다. 이로써 제1차 글로벌시대는 막을 내렸다. 냉전 종식과 통신혁명으로 시작된 제2차 글로벌시대, 즉 국경 없는 국제분업시대도 내리막길이다. 2008년 월가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유럽 재정위기, 중국 경제의 저속 성장, 미·중 무역전쟁, 우크라이나전쟁에 따른 러시아 제재, IRA 제정, 유럽의 응수까지 악화일로다.

우리의 대책은 무엇인가. 과거 제1차 글로벌시대의 최대 수혜자가 중남미 원자재 수출국들이었다면 제2차 글로벌시대의 최대 수혜자는 중국과 한국이었다. 대공황으로 수출시장이 막혔을 때 중남미는 내수 지향 전략으로 전환했다가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무역이 부활하고 공산품 거래가 주류를 이루자 아시아에 뒤처졌다. 중국은 최근 내수 부양에 역점을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구에서 중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 자원 빈국인 한국에 내수 지향 전략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수출로 사생결단을 내야 하는 우리의 유일한 길은 정면 돌파뿐이다.

기업들은 당장은 현지 투자로 내몰리고 있지만 해외 생산시설 확장은 자칫 국내 기반 약화로 이어져 장기적으로 독이 될 수 있다. 기후패권을 둘러싼 새 무역전쟁 시대에 유력한 무기인 탄소중립 기술 분야의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기술우위에 서는 길만이 장기 대안이다.

정부는 앞으로도 미국과 EU, 중국이 벌이는 기후 무역전쟁에서 파생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급급할 판이다. 그보다 이들 3자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있는 나라가 칠레와 한국뿐임을 전제로 한국은 글로벌 경제의 파국을 막는 일에 남다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우리가 확보해야 할 전략적 이익 목표를 설정하고, 국가 위기라는 인식하에 초당적 노력으로 장기간 끌고 갈 ‘전쟁 수행’ 계획이 필요하다. 대외적으로는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협력 영역을 넓히고 공급망을 확대하며, 대내적으로는 관련 산업이 생산 효율화를 통해 국제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한 제도 마련에 진력하는 것이 새 무역전쟁에서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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