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만 하면 수십개 노조 번갈아 협박…공정마다 수금하듯 돈 뜯어

입력 2022-12-25 18:11   수정 2023-01-02 16:39


“하루 세 개 노조가 찾아와 채용해달라고 요구한 적도 있어요. 한 개라도 거절하면 난리납니다.”

지난 22일 서울 강남의 한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만난 건설회사 부장 A씨는 “완공이 넉 달밖에 안 남았는데 노조 때문에 공사가 중단될까 노심초사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A씨는 5년 전 노조의 횡포와 협박에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했다. 비노조원만 채용했다가 노조원의 항의와 폭력에 공사장을 장기간 멈춘 적이 있었다.

토목·기초, 골조, 마감 등 건설 공정마다 번호표 뽑듯 군소 노조들이 번갈아 가며 찾아와 금품을 요구하고 채용을 압박하는 게 건설 현장의 흔한 풍경이 됐다는 설명이다. 민주연합, 전국연대, 전국연합, 지역 기반 특정 건설기계노조, 외국인 노조 등 A씨가 이날 직접 보여준 명함만 30장이 넘었다.
月 1000만원 받는 노조 인부
건설 현장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건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양대 노총 조합원뿐만이 아니다. 10명 이하의 크고 작은 노조가 수시로 채용을 압박하고, 이를 거부하면 ‘점거 농성’에 들어간다. 전국 건설 현장에서 이렇게 활개 치는 군소 노조가 200여 개에 달할 것으로 업계는 파악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협박을 통해 일자리를 구하거나 쉽게 돈을 벌 수 있다 보니 너도나도 노조를 만들고 있다”며 “양대 노총을 탈퇴한 사람들이 각 지역에서 별도 노조를 설립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군소 노조들은 토목과 기초, 골조, 마감 공사 등 아파트 공사 단계마다 입소문을 듣고 회사를 찾아가 실력 행사를 한다. 해당 지역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게 이들이 앞세우는 논리다. 지반을 다지는 작업인 토목 공사의 경우 지게차와 크레인 등 각종 건설 장비를 소유한 조합원이 현장을 찾는다. 큰 파일(기둥) 등을 박아 건물 기초를 다지는 기초 공사 단계가 시작되면 타워크레인 노조가 등장한다. 한 번 타워크레인이 세워지면 이를 철거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부 선정 전부터 하루에도 수십 통씩 각 노조 간부들이 돌아가며 회사 측에 전화를 건다.

한 건설사 임원은 “타워크레인 인부의 월 급여는 건설 노동자 평균의 두 배인 1000만원을 넘는 경우가 많다”며 “급여 외에 월례비란 명목으로 수백만원을 더 요구하는 사례도 많다”고 했다. 한 건설사는 2019년 전남 민주노총 노조 소속 타워크레인 기사들에게 급여 외 월례비를 1인당 월 350만원씩 주다가 “더 이상 못 참겠다”며 소송전을 벌이기도 했다.
군인·장애인 단체까지 합세
군소 노조의 압박은 골조·마감 공사 단계에서 가장 심해진다. 장비 없이 몸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이 많기 때문이다. 한 건설 현장에 많게는 30개 이상의 소규모 노조가 수시로 드나들며 아쉬운 소리를 한다는 게 현장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공사 중간중간에 이름도 생소한 각종 단체까지 끼어들어 한몫 챙겨간다. 예컨대 전직 경찰들로 구성됐다고 주장하는 속칭 경찰협회 등은 현장에서 태극기를 판다. 해당 지역의 육군첩보부대(HID)와 해병대전우회 등은 목장갑 수백만원어치를 한꺼번에 떠넘기기도 한다.

전남의 한 공사 현장에는 지역 장애인협회가 휴지와 장갑 등 100만원어치를 들고 와 대놓고 후원금을 요구하기도 했다. 한 건설사 대표는 “특정 단체 역시 팔아주지 않으면 노조처럼 현장을 막아버린다”며 “불필요한 다툼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쥐여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권용훈/장강호/원종환/김우섭 기자 fac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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