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기아의 신차 출고 대기 기간이 한 달 새 최대 1년 앞당겨졌다. 급격한 금리 인상과 경기 침체로 지갑이 얇아진 소비자들이 계약을 취소하는 사례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자금 경색에 시달리는 렌터카업체들은 최근 대규모 계약 물량을 취소했다. 차량용 반도체 수급난 완화로 생산은 늘고 있지만 수요 측면에서 ‘빨간불’이 켜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출고 대기 기간이 점진적으로 개선되는 게 아니라 계단식으로 급격히 단축되고 있다”며 “석 달가량 지나면 100만 대 이상의 백오더(주문대기)가 깨지고 몇몇 인기 차량 이외 모델에선 재고가 쌓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대차 모델 중 가장 대기가 길었던 싼타페 하이브리드는 20개월에서 16개월로 감소했다. 지난해 국내 승용 판매량 4위에 오른 아반떼는 9개월에서 6개월로, 아반떼 하이브리드는 20개월에서 16개월로 줄었다. 팰리세이드(8개월→6개월)와 전기차 아이오닉 6(18개월→16개월)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으로는 처음 승용차 판매량 1위에 오른 쏘렌토 출고 기간마저 10개월에서 5개월로 짧아졌다. 스포티지(11개월→8개월), K5(9개월→5개월), K8 하이브리드(9개월→7개월) 등 기아의 다른 인기 차종도 비슷하다. ‘신차 인도받는 게 아파트 청약 당첨 뒤 입주하는 것만큼 길다’는 볼멘소리도 과거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 대기 물량을 이용해 신차 가격을 빠르게 올리던 ‘카플레이션(카+인플레이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카드사 금리는 더 빠르게 올랐다. 지난해 초 연 1%대에서 최근 연 8%대로 급증해 소비자 부담을 키우고 있다. 한 대리점 관계자는 “기존엔 할부를 이용해 신차를 사는 소비자 비중이 70%에 달했는데, 지금은 30% 밑으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고가 차량일수록 일시불로 결제하는 비중이 더 높은 것으로 전해졌다. 자금 여유가 있는 일부 소비자를 제외하면 수요가 꺾였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모닝, 레이 등 경차부터 수개월 안에 재고가 쌓이기 시작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여러 대의 차량을 중복 계약한 고객들도 한꺼번에 취소에 나서고 있다. 출고 대기가 워낙 길다 보니 3~4대의 차를 한 번에 계약해놓고 빨리 나오는 차를 먼저 수령하려는 이른바 ‘가짜 수요’가 사라지는 것이다. 다른 대리점 관계자는 “신차가 나오기만을 1년 이상 기다리던 고객들이 갑자기 해약해달라는 전화를 걸고 있다”며 “딜러들은 신규 계약은 고사하고 남아 있는 고객들이 차를 취소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완성차업체들의 올해 실적에도 ‘빨간불’이 켜질 전망이다.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10월 기업설명회(IR)를 통해 “수요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내비쳤지만, 일선 대리점이 느끼는 현장의 경기는 빠르게 얼어붙고 있다. 수만 대씩 차량을 계약했던 ‘큰손’ 렌터카업체들도 갈수록 높아지는 금리를 견디지 못해 사업 계획을 축소하고 있다.
김형규/박한신 기자 k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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