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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 입구. 낡은 목장갑을 끼고 구겨진 외투를 입은 채 모자를 푹 눌러쓴 한 남자가 양팔로 몸을 감싸고 비스듬히 누워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노숙인이 웅크린 채 앉아 있다. 이들의 이름은 동훈과 준호다. 현대미술계의 가장 ‘문제적인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마우리치오 카텔란(63)의 올해 신작이자, 리움미술관이 올해 개관전으로 여는 전시 ‘WE’의 오프닝이다.
카텔란은 2004년 개관 이후 다소 폐쇄적이던 리움미술관을 ‘열린 공간’으로 뒤바꿨다. 미술관 로비는 기차역 대합실처럼 꾸며졌고, 도시의 불청객 취급을 받았던 비둘기들(유령, 2021)은 미술관 곳곳에서 관람객들을 쳐다본다. 세발자전거를 탄 어린아이(찰리, 2003)가 미술관 곳곳을 종횡무진 달리고, 소설 <양철북>의 오스카를 연상케 하는 소년(무제, 2003)이 전시장의 가장 높은 곳에서 드럼을 쳐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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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텔란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한 것은 ‘1억원짜리 바나나 사건’이다. 2019년 아트페어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흰 벽에 회색 테이프로 생바나나를 붙이고는 ‘코미디언’이라고 이름 붙였다. 단순히 벽에 붙은 이 바나나가 12만달러에 팔렸고, 한 작가는 벽에 붙은 바나나를 떼서 먹어버리는 퍼포먼스도 했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예술품에 가격을 매겨 사고파는 행태, 작품과 작품이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현대미술계의 현상, 나아가 갤러리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한 큰 사건이었다”고 했다.
작품 이해의 키워드는 ‘실패’와 ‘차용’이다. 전시작 중엔 세 살 이후로 더 이상 자라지 않는 북 치는 소년, 양복을 입은 채 옷걸이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년의 남자(무제, 2000), 텅 빈 책장을 마주하고 양 손등에 연필이 못처럼 박혀 옴짝달싹 못하는 작은 카텔란(찰리는 서핑을 안 하잖나, 1997) 등 인생과 유년기, 가족관계의 실패를 이야기하는 것이 많다.
카텔란의 작품이 파격적이면서도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가 미술계와 현대사회에 널려 있는 이미지들을 합법적으로 도용하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사에 획을 그은 작품들을 빌려와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는 카텔란을 미술계는 ‘대담한 표절자’라고 부른다.
미술관의 권위에 유쾌한 도전을 해온 그는 이번 전시에서 관람객이 자신의 작품들과 온전히 하나가 되기를 바라며 작품 보호 라인이나 별도 경보 센서를 두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미술관 측은 바닥에 놓이거나 무심코 부딪칠 수 있는 작품들에만 최소한의 센서를 설치했다. 리움 관계자는 “각 작품에 담긴 맥락과 유머 속의 촌철살인을 찾아보길 바란다”며 “카텔란을 시작으로 1990년대 세계 미술계에 영향을 준 작가를 꾸준히 소개할 것”이라고 했다. 전시는 7월 16일까지.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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