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소설가 낸시 클레인바움이 펴낸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웰튼 아카데미의 국어교사 존 키팅은 수업 중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이 있지. 그리고 그것을 반드시 믿어야 한다. 비록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로버트 프루스트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네.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니는 길을 선택했네. 그것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네.’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학생들은 땅에 뿌리가 깊이 박힌 나무처럼 꼼짝하지 않고 키팅 선생을 주시한 채로 방금 들은 말을 되씹었다.”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1844~1910)는 사람들이 덜 다니는 길을 선택해 인생을 바꾼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아마추어 화가 출신으로 미술사의 거장이 된 전설적인 인물이다.
루소는 1871년부터 1893년까지 22년 동안 파리 시립세금징수소에서 물품들을 검사하고 허가증을 발급하는 통행료 징수원으로 일했다. 긴 근무 중 루소에게 유일한 행복은 틈틈이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그는 41세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 늦깎이 화가였고, 미술전문교육도 받은 적이 없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만은 프로 화가를 능가했다.
1893년 49세의 루소는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은퇴를 결심한다. 하지만 독학으로 그림을 터득한 그는 전문화가에게 필요한 회화 기법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그의 미술 교재는 소박한 본성과 직관, 풍부한 상상력과 열정이었다.
영국 내셔널 국립미술관의 인기 소장품인 이 그림에는 본능적 감각으로 사물을 관찰하면서 어린아이처럼 자유롭고 소박하게 작업했던 루소 화풍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정글에 번개가 치고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갑작스러운 폭풍우에 밀림의 왕인 호랑이도 깜짝 놀라 두려움에 떨고 있다. 폭우가 쏟아지는 원시림의 자연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한 이 그림은 풍경화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지만 실제 풍경이 아니라 루소가 상상력을 발휘해 그린 가상의 정글이다.
열대지방은커녕 프랑스 밖으로 단 한 번도 나가 본 적이 없었던 루소가 어떻게 밀림의 분위기를 이토록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과 식물원의 열대온실, 동물원을 자주 방문해 관찰하고 잡지, 신문, 사진집에서 구한 자료에 풍부한 상상력을 더해 실제보다 더 실감나는 밀림의 풍경을 만들어낸 것이다. 예를 들면 이국적 식물은 실내 화분에 있는 화초를 크게 확대해 야생의 밀림 속에 배치한 것이다.
그러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전문화가의 길을 선택한 루소는 혹독한 통과의례를 치러야만 했다. 1886년 프랑스 독립미술가 협회가 주최한 앵데팡댕전에 첫 작품을 출품할 때부터 데생실력이 없다는 이유로 평론가들의 멸시와 대중의 비웃음을 받았다. 매년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했지만 번번이 낙선하는 수모를 겪었다.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루소만큼 비난을 받은 예술가는 없다. 그러나 루소만큼 자신에게 무차별로 쏟아지는 비난을 대범하게 받아넘긴 예술가도 없다. 그의 영혼은 그만큼 순수했다’는 위로의 글을 남길 정도였다.
루소는 인체 드로잉과 해부학, 명암법 등을 공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인물화를 그릴 때 모델 신체에 직접 자를 대고 이목구비 간격이나 몸 치수를 잰 다음 그대로 축소해 캔버스에 옮겼다고 한다. 피부에 맞는 색을 찾기 위해 튜브물감을 집어서 모델의 살색과 비교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해진다.
‘잠자는 집시’란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라. 인물의 자세는 부자연스럽고 인체 비율도 맞지 않는다. 집시여인의 이목구비는 아이들이 그린 것처럼 서툴고 유치하게 그려졌다. 원근법도 무시하고 만돌린은 위에서, 항아리는 수평 시점에서 바라본 형태로 표현됐다. 모래사장은 구름 모양, 달빛에 빛나는 사자의 꼬리는 자신이 사용하는 붓 형상에서 따왔다.
그러나 루소는 진보적인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도 그들의 화법을 따르기보다 자신만의 화풍을 고수했다. 그 결과 뜻밖의 현상이 벌어졌다. 혁신을 주도하던 예술가들이 루소 화풍을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다. 피카소는 루소를 위한 파티를 열어주고 그의 그림도 몇 점 구입했다. 비평가 루이 보셀은 ‘가장 배우지 못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도 재능이 넘치는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살아 있는 본보기’란 찬사를 보냈다.
뒤늦게 루소 화풍이 주목받게 된 것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서 예술성의 잣대가 기술적 완성도에서 독창성을 중시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루소의 약점에 해당하는 자유분방함과 거침없는 상상력, 촌티 나는 화풍이 유명화가들도 부러워하는 강점이 됐다. 즉 그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차별화에 성공한 것이다.
전통교육을 받은 미술가의 작품에선 느낄 수 없는 신선한 루소 화풍은 새로운 세대 예술가들에게 강렬한 영감을 줬다. 루소는 미술사에서 ‘소박파’로 불리는 독창적 양식을 개척한 거장으로 이름을 남겼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관련뉴스